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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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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간 시인

동아닷컴입력 2016-09-23 11:19수정 2016-09-23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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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림 유고 전집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최측의농간, 2016)

밤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꿈꿀 수 없듯이 침묵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말[詩]을 얻을 수
없다.

내가 지금, 왜, 침묵을 말하고 있느냐 하면, 침묵처럼 무섭고 슬프게 살다 간, 한 시인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인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를 몇 편 보내어 당선의 영예를 안았을 뿐,그 이후 어떤 곳에도 작품 한편 발표하지 않았으며, 시인이라는 관사를 쓰고 어느 자리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홀로 남양주의 작은 아파트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밤마다 술을 마시고 골목을배회하고 시를 쓰다가 죽었다. 뒤늦게 친구들이 찾아가 시신을 불태우고 재를 산과 강에 뿌렸다.

그가 여림이었다.

최하림, 「그는 왜 침묵을 살아야 했을까」 중에서

전화는 언제나 불통이었다. 사람들은
늘 나를 배경으로 지나가고 어두워진
하늘에는 대형 네온이 달처럼
황망했었다. 비상구마다 환하게 잠궈진
고립이 눈이 부셨고 나의 탈출은 그때마다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살아있는 날들이 징그러웠다. 어디서나
계단의 끝은 벼랑이었고 목발을 쥔 나의 손은 수전증을 앓았다.

여림, 「계단의 끝은 벼랑이었다」 전문.

계단 끝에 선 시인, 우리에게 여림은 무엇보다도 ‘응답 없음’의 시인이었다.
아는 사람들은 절실히 알 것이다. 시인 ‘여림’(본명 여영진)의 유고시집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2003, 작가)를 손에 넣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시집들이 그렇듯 초판조차 겨우 소진된 채 잊혀진 이 시집은 오히려 절판 후에야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거의 대부분의 도서관에서도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라는 이 기이한 시집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그의 시를 알게 된 많은 독자들은 그러므로 유고시집에 실려 있는 작품들조차 제대로 접하기 어려웠다. 단지 누군가가 부분적으로 필사한 노트나 인터넷 공간의 한 귀퉁이에서, 혹은 어떤 시인들의 아주 짧은 글 토막에서 그의 시를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접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의 시들은 시인을 따라 닿을 수 없는 저편으로 발화해버린 것만 같았다.


여림은 등단 후에도 자신의 시들이 묶여 한 권의 시집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을 보지 못했던 시인이었다. 시인이 되고자 서울에 왔으나, 역설적으로 시를 떠나고자 서울을 탈출하였을 때, 세상은 그가 시인임을 알아주었다. 신춘문예를 다룬 한 칼럼에서 비평가 황현산은 시인이 스스로 자신을 시인으로서 자각, 선언하는 순간이야말로 한 인간이 시인으로 태어나는 가장 중요한 실존의 전환점이라고 쓴 적이 있다. 고독하게 살면서 밤마다 술을 마시고 골목을 배회하고 시를 쓰다가 죽었던 여림은 등단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시인이었다. 스스로를 고독 속에 가둔 채 끈질기고 간절하게 시인으로 살다 떠났던 사람. 세상에, 시에 사로잡힐 때
마다 여림은 늘 그보다 몇 발짝씩은 더 절망하였다.

나는 절망한다
아니,
절망도 아닌 그 무엇
어머니는 새벽 기도를 나가시고 나는,
갈수록 흐려지는 눈을 헤집으며 여기 앉았다
이빨을 지그시 짓누르는 삶은 회한들
그러고도 모자란 듯 호흡은 갈수록 나를 괴롭힌다
시를 쓰는 자들의 영특함, 혹은 영악함
자신과의 어떤 축, 혹은 城을 구축하려는 모습이
눈을 감고 그 눈 속이 쓰린 만큼 아프다
나는 꿈을 이루었다
이것으로 되었다
시인이 되고 싶었을 따름이지 시인으로서 굳이
어떤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
힘이 든다
여지껏 시와 내가 지녀왔던 경계심, 혹은 긴장감, 들이 한꺼번에 용해되면서 나는 밤낮으로 죽지 않을 만큼만 술을 먹었
고 그 술에 아팠다.
생각해 보라
35년을 아니, 거기에서 10년을 뺀 나머지의 생애를 한 사람이 시로 인해서 피폐해 갔다

여림, 「1999년 2월 3일 아침 04시 40분」 부분.

흐르는 강물에도 세월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겨울, 북한강에 와서 나는 깨닫는다....

조금씩 흔들리는 섬세한 강의 뿌리
이 세상 뿌리 없는 것들은 잠시 머물렀다
어디론가 쉼 없이 흘러가기만 한다는 것을
나는 강물 위를 떠가는 폐비닐 몇 장으로 보았다
따뜻하게 안겨오는 강의 온기 속으로
수척한 물결은 저를 깨우며 또 흐르고
손바닥을 적시고 가는 투명한 강의 수화,
너도... 살고 싶은 게로구나...

여림, 「겨울, 북항강에서 일박」 부분.

강물 위로 떠가는 폐비닐 몇 장으로 그는 무엇을 보았던 것인가. 시가 막힐 때, 그는 종종 북한강에 나가 흘러가는 강물을바라보며 스스로를, 시심詩心을 다독이곤 하였다.
시간차의 비극은 죽은 시인을 대면할 때 더욱 강렬해진다. 시인은 말이 없었고 남겨진 것은 그의 사랑과 상처의 기록들뿐이었다. 비로소 시집의 모든 작품을 볼 수 있게 된 그 순간을 잊을 수는 없다. “여림은 침묵을 이길 수 있었던가, 여림이 침묵 그 자체였던가 하는 물음이 바닷가의 파도처럼 내 목을 친다.”고 썼던 최하림 시인의 물음은 북한강 언저리에서 또 다른 침묵이 되고 있었다.

여림 전집의 기획은 유고시집의 복간 계획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015년 가을이었다. 기획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유고시집에 묶이지 못했던 미발표 원고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것. 그 외에도 많은 자료와 작품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복간 계획은 자연스럽게 전집이라는 신간 계획으로 수정되었다. 무엇보다 그의 잠들어 있던 다른 작품들을 한편이라도 더 읽어 보고 싶었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 경험을 전하고 싶었다.

유고시집에 포함되지 않았던 원고 외에도 적지 않은 분량의 잠들어 있던 원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오랜 협의와 원문 대조, 편집, 교열 과정을 거쳐 여림 유고 전집의 출간 작업은 구체화 되었다.

그의 시를 더 읽고 싶었던 많은 사람들은 기다리고 찾다 지쳐, 서서히 그를 잊고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 책에는 무엇보다 그를 기억하고 그의 시를 한편이라도 더 만나고 싶어 했던 어떤 사람들에게 기쁜 놀라움을 전하고 싶은 바람이 담겨 있다.

‘안개 속으로 걸어간’ 시인 여림을 우리는 이제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간’ 시인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최측의농간에서는 미완성 상태의 짧은 단락으로 남아 있는 유작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을 시인 자신의 운명과 그를 추적하는 우리들 삶의 한 컷에 대한 중층 은유로서 전집의 제목으로 수습하였다.여림은 응답 없음의 시인이 아니었음을, 그의 전집이 말해 줄 것이다.

‘살아가는 일로서만/모든 것들이 이루어지질 않는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고민했던 여림이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이라고 썼을 때, 그는 이미 우리에게 응답하였다. 잡스러운 전파들의 공해 속에서 시인 여림을 수신하기 위하여 최측의농간은 안테나 하나를 간신히 세운다.

<본 자료는 해당기관에서 제공한 보도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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