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진단]로봇세와 기업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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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산업부 차장
허진석 산업부 차장
세계 최고 부자인 빌 게이츠가 새삼 세상의 주목을 다시 받고 있다. 로봇세 신설 주장 때문이다. 로봇이 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으니 그런 로봇을 소유한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걷자는 생각을 최근 밝혔다. 실직자를 위한 복지에 쓰자는 것이다. 컴퓨터 운영체제로 큰돈을 번 후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을 설립한 그는 자선과 기부로 세상의 관심을 계속 받고 있다.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가 있는 시애틀에는 닉 하나우어라는 벤처캐피털리스트도 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침구 회사를 경영하면서 정보기술(IT) 업체에 투자해 큰돈을 번 인물이다. 아마존 창업주 제프 베저스의 가족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첫 번째 아마존 투자자였다.

그는 자신을 기업가 겸 시민운동가라고 스스럼없이 소개한다. 시애틀에서 최저 시급을 15달러로 올려야 한다는 운동을 주도했다. 2014년 6월 시애틀은 최저 시급 15달러를 법제화한 미국 최초의 도시가 됐다.

30여 개 기업의 설립과 투자에 참여하고 은행까지 소유하면서 자본주의와 비즈니스에 대한 시야를 넓힌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상품을 살 수 있는 여력을 가진 중산층이야말로 자본주의 번영의 근간이라는 것이다(자본주의 번영의 결과가 중산층이 아니라는 말이다). 정부 보조를 받지 않는 여유 있는 근로자를 늘려야 기업도 더 많은 소비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이다.

빌 게이츠가 말한 로봇세는 부(富)가 한 곳으로 집중되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을 줄이려는 아이디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인공지능(AI)과 로봇으로 생산성을 혁신적으로 높인 기업이 나타나면 부는 더 소수의 계층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자리가 줄어들면 사회 전체의 수요 창출을 위해서라도 기본 소득이 필요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빌 게이츠나 닉 하나우어 같은 상위 0.1%의 사람들이 점심으로 1000끼를 먹을 수 없고, 고급 자동차 외에는 차량을 구매하는 데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로봇세는 미래 사회에서 기본 소득 제도를 실시하는 데 주요한 재원이 될 가능성이 있다.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라는 경제 논리가 있다. 대기업이나 부유층의 부를 먼저 늘려주면 중소기업이나 소비자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얘기다. 닉 하나우어와 빌 게이츠는 부자임에도 낙수효과와는 반대되는 ‘분수효과(fountain effect)’를 얘기하고 있다.

빌 게이츠의 로봇세 주장으로 닉 하나우어까지 떠올리게 된 것은 한국의 상황과 너무 대비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은 검증이 필요하고 논란이 계속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대표적인 부자들이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여느 부자들과는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부러운 대목이다.

한국에서는 많은 대기업 경영자가 최순실 사태에 엮여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대통령의 요구를 거부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 기업인들의 무죄 주장에 일리가 있다. 검찰과 특검이 대기업을 피해자와 피의자로 각각 달리 본 것도 사건의 여러 측면을 방증한다.

다만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사회의 평판이 지금과 달랐다면 여론의 향방도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존경받는 기업이 많을수록 기업을 색안경 끼고 보는 시각도 줄었을 것이고, 과도한 출국금지에 발이 묶여 경영활동을 위한 금쪽같은 시간을 활용하지 못하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사회의 효율성과 품격을 모두 높일 수 있는 존경받는 부호가 늘어나길 기대한다.

허진석 산업부 차장 jameshur@donga.com
#로봇세#기업#일자리#세금#빌게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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