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은 정책 파트너”… 民官 손잡고 탁상행정 넘어선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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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부 시스템을 바꾸자]<상> 더 좋은 정책 어떻게 만들까

《 정책 수요자인 시민의 요구는 다양해지고 사회 문제는 복잡해진다. 이를 만족시키는 더 좋은 정책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다음 달 9일 대통령선거를 통해 출범하는 새 정부의 고민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동아일보는 정부 혁신의 세계적 흐름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모든 과정에서 기존의 옷은 벗어 던져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

인천 서구 주안국가산업단지 ‘디자인특화거리’. 잿빛 공장과 깨진 보도블록 등 살풍경이 시민으로 구성된 ‘국민디자인단’의 정책 제언으로 밝게 바뀌었다. 인천시 제공
인천 서구 주안국가산업단지 ‘디자인특화거리’. 잿빛 공장과 깨진 보도블록 등 살풍경이 시민으로 구성된 ‘국민디자인단’의 정책 제언으로 밝게 바뀌었다. 인천시 제공

30년 이상 된 공장이 밀집한 인천 서구 가좌동 일대 주안국가산업단지. 2년 전까지만 해도 보도블록은 깨지고 가로등은 드문드문 서 있는 데다 불법 주차 차량들이 길가를 점령했다. 해가 지면 지나는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고 청년들은 단지 내 공장 취업을 꺼렸다.

지금 주안산단에서 이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잿빛 공장들에는 기업의 특색을 알리는 알록달록한 벽화가 그려졌다. 공터에는 산단 직원을 위한 쉼터가 마련됐다. 주차구획선을 긋고 보도블록을 교체하면서 걷기에 편한 거리로 변했다. 지난해 시행한 ‘디자인특화거리’ 조성 사업의 결과다.

당초 사업 방향은 조금 달랐다. 유명 작가를 불러 화려한 벽화를 그리게 하고 컨테이너를 활용해 상품쇼룸을 만들려고 했다. 푸드트럭 행렬을 거리에 만들자는 계획도 있었다. 시민 15명으로 구성된 ‘국민디자인단’이 제동을 걸었다. 이들은 유명 작가 섭외에 따른 비용과 유지 보수의 어려움, 새 시설물을 설치하기에는 협소한 도로 환경 같은 문제점을 잡아냈다. 인천시 관계자는 17일 “현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탁상행정이 될 뻔했는데 이를 실제 사용자들이 참여해 개선했다”고 말했다.

○ 정책 아이디어부터 수행까지 시민과 협업


이처럼 시민이 정책의 대상자로만 머물지 않고 정책의 입안부터 실행까지 직접 참여해 자신의 아이디어와 요구를 반영하는 방식을 민관(民官) 공동생산이라고 부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해 ‘공동생산, 경제위기에 처한 새로운 공공서비스 혁신 전략’ 보고서에서 “재정의 한계와 관료조직의 경직성을 극복하기 위해 민관 공동생산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분석했다.

각국 정부는 이를 반영하는 다양한 제도를 내놓고 있다. 2010년 시작한 미국의 ‘challenge.gov’는 정부 혼자서는 해결하기 힘든 각종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시민의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플랫폼이다. 정부가 과제를 공모하면 시민이 응모한다. 토론과 검증을 거쳐 채택된 제안자에게 상금을 준다. 지난해 말까지 공모전 736개를 열어 누적 상금만 2억5000만 달러(약 2843억 원)가 넘었다.

최근 사례로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인 배변’ 처리 과제를 들 수 있다. NASA는 감염 방지 시간이 짧은 기존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이 사이트를 통해 아이디어를 공모했다. 가정의학과 의사 등의 아이디어가 채택됐다. NASA는 지난달 말 “이를 반영해 수년 내에 새 시스템을 개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아예 정책 결정과 집행의 모든 과정을 민간에 맡기기도 한다. 영국에서 시작돼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사회성과연계채권(SIB)’이 대표적이다. 영국 법무부는 2010년 단기 재소자의 재범률을 낮추는 방안을 강구하던 중 사회적투자 전문기관인 ‘토털임팩트캐피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민간기관이 투자를 유치해 피터버러 시(市) 교도소 출소자의 재범률을 다른 교도소보다 7.5% 이상 낮추면 투자액에 성과금을 더해 주기로 한 것.

정부가 직접 하거나 민간에 맡기더라도 사업 내용을 미리 정하고 발주해 예산만 지원하는 기존 방식과는 완전히 달랐다. 1년 후 전국 평균 출소자 재범률이 11% 증가하는 동안 피터버러 시는 12% 줄어드는 기적을 낳았다.

이후 SIB는 세금 낭비를 방지하면서도 기존 민자사업의 단점인 ‘공공성 약화’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퍼져 나갔다. 2012년 미국에서는 세계적 투자은행 골드만삭스가 투자자를 모집해 뉴욕 시 청소년 범죄 재범률을 줄이는 데 성공했다. 벨기에에서도 SIB를 통해 청년 이민자의 취업률을 높이는 성공 사례를 낳았다.

핀란드 정부도 온라인 플랫폼 ‘참여실험실(kokeilun paikka)’을 가동하고 있다. 시민들이 새로운 정책이 필요한 사회 문제와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정책 실행에 필요한 자금을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모금하고 집행에도 참여한다.

○ “시민은 정책 파트너…전면 개방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2013년 출범한 ‘국민디자인단’ 같이 일부 성과를 내는 것도 있다. 그러나 민관 공동생산 수준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릴 필요성이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정책 아이디어에 대한 포상제도는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시가 2006년부터 운영하는 ‘천만상상오아시스’ 제도는 최대 상금이 20만 원이다.

SIB는 서울시와 경기도가 각각 2014년과 2015년 조례로 도입했다. 지난해 서울시가 정책 사각지대에 놓인 ‘경계선 지능(IQ 71∼84) 아동’의 정서 회복과 사회성 개선 시범 사업으로 11억 원의 투자를 유치하며 겨우 첫발을 뗐다. 관련 법률이 없어 중앙정부나 조례를 만들지 않은 다른 지방정부로 확산되진 못한 상태다.

전문가들은 민관 공동생산 체계가 안착하기 위해선 관료사회의 인식 개선을 필수로 꼽는다. 오철호 숭실대 행정학부 교수는 “공직사회의 갑을(甲乙) 문화와 정부가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발전 국가 사고방식을 청산하고, 시민을 정책 파트너로 인정해 정부를 전면 개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행정부#정책#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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