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종석]탱크와 빈 잔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5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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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석 스포츠레저부 차장
김종석 스포츠레저부 차장
무뚝뚝한 줄만 알았던 그의 입에서 구성진 가락이 흘러나왔다.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손으로 마이크를 잡은 모습은 여느 가수 못지않았다. “나의 빈 잔에 채워 주∼.”

애창곡인 남진의 ‘빈 잔’을 부르던 ‘탱크’ 최경주(41). 2007년 11월 ‘최경주 재단’ 출범식이 끝난 뒤 지인들이 마련한 축하연에서였다. 당시 최경주의 ‘잔’은 넘쳐흘렀다. 그해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서 2승에 상금 랭킹 5위(458만7859달러)에 오르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그런데도 “잔을 비워야 한다. 늘 또 다른 무언가를 담아야 한다”고 말하던 그의 진지한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최경주의 잔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이듬해 1월 소니오픈 우승을 끝으로 3년 넘게 트로피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런 최경주가 16일 끝난 ‘제5의 메이저대회’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우승했다. 40개월 동안 무관에 그치다 74개 대회 만에 정상에 오른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우승하고 눈물 흘리는 장면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기억을 되살려봤다. 2002년 5월 컴팩클래식에서 PGA투어 첫 우승을 했을 때였다. 당시 기자가 쓴 본보 기사에는 ‘눈물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는 표현이 나왔다. 이번 우승이 첫 승만큼이나 감격스러웠던 모양이다.

최경주는 당시 축하연에서 “앞으로 10년 동안 살아남으려면 확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체중을 10kg이나 뺐고 스윙도 교정했다. 그는 “그렇게 좋아하던 김치찌개와 삼겹살도 끊었다. 탄수화물이 많은 밥도 줄였다”며 독하게 다이어트를 실천했다. 하지만 결과는 나빴다. 무리한 감량으로 몸의 균형이 깨지며 부상까지 겹쳤다. 2009년 후배 양용은이 타이거 우즈를 꺾고 PGA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해 먼저 메이저 챔피언이 되면서 아시아 최고라는 자존심에도 상처를 입었다.

그래도 주저앉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를 가졌다. “장거리 비행을 하려면 중간에 급유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예요.” 지난해 체중을 다시 늘리고 스윙을 한층 간결하게 다듬어 컨디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기름을 채운 그는 올해 들어 고공비행에 들어갔다. 우승을 포함해 최근 4개 대회 연속 톱10 진입. 한때 ‘이젠 끝난 게 아니냐’는 주위의 시선은 ‘역시 최경주’라는 찬사로 바뀌었다.

최경주는 투박한 촌사람 이미지를 지녔지만 필드에선 누구보다 얼리어답터이며 하이브리드(잡종) 스타일로도 유명하다. 눈에 띄는 오렌지색 국산 샤프트를 들고 나오는가 하면 칠 때마다 참치 캔 따는 소리가 나는 사각 드라이버에, 홍두깨처럼 두툼한 퍼터 그립을 사용해 눈길을 끌었다. 드라이버, 아이언, 유틸리티 우드, 퍼터, 공을 서로 다른 브랜드로 섞어 쓰고 있다. 자신의 플레이에 도움이 되는 측면만 생각할 뿐 남들의 시선이나 용품 선택의 편견 등은 모두 버렸다.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쾌거를 이룬 최경주의 시선은 벌써 다음 목표를 향하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어요. 10승을 채워야 하고 메이저 우승의 꿈도 이뤄야죠. 후배들을 이끌어야 하고 늘 성원해주는 국민 여러분에게 보답도 해야 합니다.”

최경주는 자신을 ‘용수철’에 비유했다. 늘어났다가 항상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뛸 채비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변화와 도전, 열정과 땀으로 빈 잔을 채워온 최경주. 진격을 멈추지 않는 국민 탱크 포에버!

김종석 스포츠레저부 차장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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