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슈]떠들썩했던 너의 스릴 눈에 선한데… 사라지는구나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7월 21일 03시 00분


코멘트

11월 철거되는 서울 어린이대공원 ‘청룡열차’를 보내며

○ 2012: 조용한 은퇴

28년 동안 정해진 궤도를 수도 없이 돌았다. 레일이 모두 사라지면 어디로 가야 할까. 2대 청룡열차는 지난달 29일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멈춰 섰다. 열차는 매각되거나 고철로 처리될 예정이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28년 동안 정해진 궤도를 수도 없이 돌았다. 레일이 모두 사라지면 어디로 가야 할까. 2대 청룡열차는 지난달 29일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멈춰 섰다. 열차는 매각되거나 고철로 처리될 예정이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지금부터 오랜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켜온 서울어린이대공원 청룡열차의 마지막 운행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동안 청룡열차를 사랑해 주신 손님 여러분 고맙습니다. 여러분은 이 열차의 마지막 승객입니다.”

지난달 29일 오후 8시 55분, 어둠이 거의 내려 온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놀이동산. 운행 시작을 알리는 직원의 안내방송이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24명이 탈 수 있는 열차에 탄 승객은 12명. 열차가 체인에 끌려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레일을 오르기 시작했다. 20m를 올라간 뒤 자유 낙하를 시작해 약 2분 동안 360도 회전과 나선형 회전(코르크스크루) 구간을 지나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운행. 마지막을 기념하는 거창한 퇴역식은 없었다. 관중의 눈물 섞인 환호성이나 아쉬운 박수도 없었다. 임순규 놀이동산 운영과장을 비롯한 3, 4명의 직원들이 승객들이 앉지 않은 빈 자리에 앉아 기념주행을 한 게 전부였다. 한 여자 승객이 자신의 아들에게 “이제 이거(청룡열차) 안 한대. 오늘이 마지막이야”라고 말했지만 아들은 심드렁했다.

“열차가 곡예를 부릴 때도 ‘재미있다’는 생각보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죠.” 임 과장은 하던 말을 멈추고 26년간 함께한 청룡열차를 바라봤다. 5분 정도 말없이 열차를 둘러본 그는 레일을 받치고 선 기둥에 손을 댄 채 말했다. “다른 테마파크는 오래된 기종이 운행을 중단하면 은퇴식도 해주던데….”

청룡열차는 이날부터 역사 속으로 사라질 준비를 시작했다. 정류장의 손때 묻은 장비와도 이별이다. ‘안전대를 확인해 달라’고 손으로 쓴 안전수칙 안내판, 키가 작은 아이를 골라내기 위해 만든 110cm 길이의 나무 자, 손님들을 빨리 입장시키기 위해 표 넣는 구멍을 세 개나 뚫은 집표기와도 안녕을 고해야 한다.

○ 1973: 화려한 등장

놀이동산에 전시된 원조 청룡열차.
놀이동산에 전시된 원조 청룡열차.
청룡열차의 등장은 화려했다. 1973년 5월 5일 서울 어린이대공원 개장과 함께였다. 개원식은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와 양택식 당시 서울시장, 서울시내 국민학생 등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어린이대공원은 우리나라 첫 테마파크였고, 청룡열차는 첫 롤러코스터였다. 청룡열차는 ‘드릴(스릴) 만점’의 놀이기구라는 평을 받으며 국민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청룡열차는 5칸으로 되어 있었다. 한 칸에 4명씩 모두 20명이 탈 수 있었다. 500m의 궤도를 최고시속 60km로 달렸다. 달릴 때마다 열차 양 옆에 그려진 푸른색 용 두 마리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거창한 코스는 없었지만 세 번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각기 다른 재미를 줬다. 첫 번째는 11.8m에 달하는 높이로, 두 번째는 가장 긴 내리막 코스로, 세 번째는 급경사 코스로 자신만의 매력을 발산했다. 이 중 승객들이 가장 좋아한 코스는 두 번째. 긴 내리막은 제일 스릴이 넘쳤다.

연인들은 청룡열차에서 사랑을 꽃피웠다. 당시 놀이동산에서 근무했던 정재선 파주 평화랜드 관리부 실장은 “청룡열차는 연인들의 필수코스였다”고 말했다. 청룡열차를 타다 무서우면 자연스럽게 옆에 앉은 연인에게 의지하게 되니 손도 잡게 되고 팔짱도 끼게 됐다는 것이다. 정 실장은 “열차를 타기 전에는 손도 잡지 못하던 사람들이 내려올 때는 거의 서로 끌어안고 나오더라”며 웃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열차를 타고 싶은 일부 시민은 새치기를 일삼았다. 당시 놀이동산의 새치기 문화는 여러 언론에서 다룰 정도로 중요한 사회문제가 됐다. 동아일보도 1977년 10월 24일자 ‘횡설수설’에서 “줄에도 서 있지 않던 어른들이 나타나 자리를 차지해 꼬박 줄을 서서 기다리던 어린 것들은 뒷전으로 밀려난다”며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대공원에서마저 어린이들은 푸대접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썼다.

일부에서는 질서를 해치는 어른들의 출입을 규제하라고 주장했다. 명색이 어린이대공원인데 어른이 너무 많다는 이유였다. 1976년 3월 경향신문에는 “청룡열차는 차례를 기다리는 어른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어서 감히 타볼 엄두조차 못 낸다”며 “어린이들을 위해 마련된 공원이 마치 어른들의 놀이터나 밀회 장소로 인식된다”는 기고문이 실리기도 했다.

○ 1984∼1990년대 초: 전성기

어린이대공원의 2대 청룡열차인 88열차는 1984년 운행을 시작해 청룡열차의 전성기를 열었다. 88열차라는 이름은 직원 공모로 결정됐다. 1981년 88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뒤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88 열풍’이 놀이동산까지 불어온 것이었다. 88열차라는 이름은 26년간 쓰였다. 현재 놀이동산을 운영하는 아이랜드는 2010년 ‘(1988년을 떠올리게 해) 열차 이름이 다소 오래된 느낌을 준다’며 다시 청룡열차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88열차는 당시 15억여 원을 들여 만든 ‘귀하신 몸’이었다. 궤도 길이는 587m로 1대 청룡열차와 비슷했지만 최고 시속이 80km에 육박했다. 지금 여러 테마파크에서 운영하는 시속 75∼100km의 롤러코스터에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임 과장은 1984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를 ‘88열차의 전성기’라고 표현했다. 당시 열차는 지금의 두 배에 가까운 운행횟수를 자랑했다. 주말에는 하루에 130번 이상을 주행해 하루 이용 승객이 2800여 명에 달했다. 열차 탑승을 기다리는 줄은 200m를 넘었다. 열차를 기다리며 구불구불 이어진 줄은 15겹으로 이어지고도 모자라 놀이동산 울타리 밖까지 연결됐다.

어린이날이 다가오면 놀이동산은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임 과장은 매년 5월 4일이면 동대문구에 있는 한 업체를 찾아 바리케이드를 빌려왔다. 놀이동산 울타리 곳곳에 있는 임시 출입문을 폐쇄하기 위해서였다. 출입문을 한 개만 남겨두고 모두 막은 다음에야 임의로 드나드는 손님들을 겨우 통제할 수 있었다.

○ 퇴장, 그 후

국민과 함께 울고 웃었던 두 청룡열차는 질주를 멈추고 철거를 기다리고 있다. 2대 청룡열차(88열차)는 2008년 ‘3년 시한부 인생’을 통보받은 뒤 보수작업을 거듭했지만 지난해 11월 안전진단에서 ‘2012년 6월 30일까지 운행 가능하다’는 최종 선고를 받았다. 서울시는 이에 맞춰 이달부터 운행을 정지하고, 2014년 3월까지 162억7000만 원을 들여 놀이기구 9개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2대 청룡열차는 서울시 소유 시설로, 아이랜드가 서울시설공단으로부터 놀이동산을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다. 재정비사업은 시 동부공원녹지사업소가 맡았다.

2대 청룡열차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11월부터 철거가 시작될 예정이지만 다른 나라나 기업에 매각할지 고철로 처리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보존은 검토 사항이 아니다. 서울시 공원녹지정책과 관계자는 “보존할 만큼 큰 가치가 있는 기구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린이대공원 관계자는 “안전진단에 탈락해 더 운행이 불가능한 고철덩어리일 뿐”이라고 했다.

1대 청룡열차는 찬밥 신세를 넘어 아예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1대 열차는 궤도 일부와 함께 2대 청룡열차의 아래쪽에 전시돼 있다. 1984년 당시 놀이동산 측이 “우리나라 최초의 롤러코스터로서 가치가 있다”는 이유로 보존하기로 해 폐기처분은 피한 것이다. 그러나 시 관계자들은 1대 청룡열차가 놀이동산에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어린이대공원 관계자는 원조 청룡열차의 처리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런 게 있었냐”고 되물었다.

1대 청룡열차는 놀이동산이 관리해왔지만 재조성사업이 결정된 뒤로는 관리를 중단했다. “어차피 없앨 것 아니냐”는 것이다. 열차는 페인트가 벗겨져 군데군데 녹이 슬었고 바닥 골조로 쓰인 나무는 썩어가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달 시의 근현대 유산을 보호하는 ‘미래유산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시민들의 보존 신청을 받고 있지만 아직까지 청룡열차를 보존해 달라는 신청자는 없다.

새로 설치되는 롤러코스터는 ‘청룡열차’의 이름을 계승하게 될까. 그럴 가능성은 낮다. 시 동부공원녹지사업소 관계자는 “아무래도 요즘 추세에 맞는 이름으로 바뀌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청룡열차는 결국 추억 속으로 사라질 운명인 걸까.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채널A 영상]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무서운 롤러코스터는 이것!


#청룡열차#철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