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트 포커스]母性, 본능인가 학습인가

  • 입력 2003년 10월 9일 16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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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위해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받아왔다. 그러나 가족구조가 급격히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어머니들은 벅차고 힘겨워하며 때로 ‘어머니상’의 신화를 깨뜨린다. 이종승기자urisesang@donga.com

자식을 위해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받아왔다. 그러나 가족구조가 급격히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어머니들은 벅차고 힘겨워하며 때로 ‘어머니상’의 신화를 깨뜨린다. 이종승기자urisesang@donga.com

《엄마들이 달라졌다.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 할 대중매체 속의 요즘 엄마들은 아이를 죽이기도 하고, 계모들이 생모보다 더 모성적이다. 현실에서는 원정출산을 감행하는 극성엄마들과, 출산율이 세계최저일 만큼 어머니 되기를 거부하는 여성들이 공존한다. 가족구조가 급격히 변동하는 요즘, ‘모성은 아름답다’는 절대가치는 어떤 변화를 겪고 있을까. 인간의 모성은 타고나는 것일까, 아니면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것일까.》

○ 대중매체 속의 달라진 모성

8월 개봉됐던 영화 ‘4인용 식탁’에서는 육아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엄마가 갓난아이를 내던져 죽이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10일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식에서 상영될 영화 ‘아카시아’의 결말 역시 그에 못지않게 충격적이다. 이 영화에서는 아이가 없던 결혼 10년차 부부가 양자를 입양했는데 아내(심혜진)가 뒤늦게 임신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이 영화는 친자에 집착하는 가족, 키운 아들과 낳은 아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성이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비극을 통해 뿌리를 중시하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고발한다.

한편 지난달 방영된 SBS 드라마 ‘팥쥐엄마’에는 모성을 포기하는 친엄마(김청), 친엄마보다 더 아이들을 사랑하는 새엄마(박미선)가 등장했다. 최근 종영된 영화 ‘바람난 가족’에서도 주인공 호정(문소리)이 진실한 애정을 쏟던 유일한 대상은 입양한 아들이었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최근의 영화들은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었다고 해서 본능적으로 아이에 대한 애착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묘사를 통해 모성의 신화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바라봤다.

환상 속의 어머니와 실제의 어머니는 다르다. 처한 조건과 가족 환경에 따라 여성들이 생각하는 모성도 제 각각이다.

○ 이 시대의 모성

원정출산과 조기교육 열풍 등 엄마들의 극성은 극단으로 치달아가는 반면 핏줄을 공유하지 않는 ‘탈(脫)혈연’관계인 모자, 모녀도 느는 추세다. 서로 다른 조건에 처한 엄마들이 생각하는 모성도 각양각색이다.

▽일하는 엄마들=본능 vs 책임감

정은주씨(38)는 어린 두 딸을 두고 혼자 2년간 일본 유학을 다녀와 지금 네일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딸들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엄마가 내게 집착하지 않고 자기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내 어린시절의 소망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매일 오전 9시에 출근해 새벽 1시에 퇴근하는 정씨에게 가족들은 농담 삼아 “혹시 계모 아냐?” 하고 가벼운 질책을 건넨다. 스스로도 모성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는 정씨는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의무, 책임감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반면 이른바 ‘대치동 엄마’인 한태숙씨(45·호텔 홍보실장)는 “모성이 본능이 아니면 뭐냐”고 반문한다. “내 몸을 통해 나온 자식에 대한 애착은 본능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 그는 “자녀 교육에 집착하는 것도 부모라면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새엄마들=“핏줄만 자식인가”

이재숙씨 (33·가명)는 한 달 전 재혼해 11세짜리 딸의 ‘새엄마’가 됐다. 이씨가 낳은 친자식은 전 남편이 키우고 있다. 이씨는 “지금 딸이 친자식 같지는 않아도 누가 ‘아이’에 대해 불쑥 물으면 지금 같이 사는 딸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고 했다. 어머니 노릇을 ‘의식적’으로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성은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내 몸의 일부였다가 떨어져나간 존재(친자식)와 독립된 개체(양딸)가 내게 온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는 것.

한편 아들 둘을 두고도 최근 생후 24일된 딸을 입양한 주부 조정숙씨(46)는 “가끔 ‘이 아이를 위해 내가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저절로 할 만큼 친딸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는 “가족이 꼭 핏줄로만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같이 살기로 선택했으면 가족”이라고 말했다.

▽‘Child-only’에서 ‘Child-free’까지

전업주부 전재경씨(31)는 연년생 자녀를 돌보기 위해 방송국 아나운서를 그만두었다. 유난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가 양육에 몰두하는 이유는 “피드백이 주는 기쁨” 때문이다. “그 어떤 직장생활도 아이만큼 피드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성은 본능”이라면서 “임신했을 때 아이와 한 몸으로 호흡을 함께한 기억과 모유 수유는 엄마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고 말했다.

반면 결혼 13년차인 안소연씨(39·출판사 사장)는 남편과의 합의에 따라 아이를 낳지 않았다. 그는 “출산과 양육이 사회적 의무이지만, 나는 출판사를 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그 의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모성은 인간관계”라고 생각한다. “자식과 거리를 둘 수 없고, 엄마가 행복하지 않은 모성은 집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생물학적 시선=모성은 본능인가?

인간과 유전적 레벨이 가장 비슷하다는 쥐를 대상으로 생물학자들이 실험을 거듭한 결과, 지금까지 암컷 쥐의 모성적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 5개가 발견됐다. ‘메스트’ ‘Peg3’ 등으로 알려진 이 유전자들에 변화를 주면 암컷 쥐는 모성적 행동을 하는 데 장애를 보인다. 이를 인간과 직접 연관지을 수는 없지만, 2001년 미국 듀크대 연구팀은 ‘Peg3’ 유전자가 쥐뿐 아니라 사람에게서도 발견되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모성은 본능적인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미국 터프대학의 신경과학자 로버트 브리지스 교수는 “쥐의 경우에도 경험의 축적과 함께 모성적 행동이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Peg3’를 제거한 암컷 쥐가 첫 출산 때에는 새끼들을 돌보지 않았으나 세 번째 출산 때부터는 새끼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을 터득하더라는 것.

동물의 모성적 행동에는 유전자 뿐 아니라 호르몬도 영향을 끼친다. 사람의 경우에도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호르몬의 균형이 출산 후 산모가 아이에게 애착을 갖는 정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연구도 있다.

최재천 서울대 교수(생물학)는 “사람은 호르몬의 영향을 덜 받고 인지과정이 훨씬 중요하지만 모성이 완전히 경험에 의해 습득되는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최 교수는 “모성은 상당부분 유전적 규정을 받으며 대부분의 포유동물은 거의 완벽하게 암컷들이 새끼를 보호한다”면서도 “모성이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이라는 사실과, 이를 확대해 양육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부가하는 모성 ‘이데올로기’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사회학적 시선=모성은 학습되는 것?

때론 어머니들은 아이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그런 스스로를 자책한다. '자식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는 전통적 모성은 줄어든 반면, 자신의 삶과 양육의 의무 사이에서 힘겨워 하는 '갈등적 어머니'들이 부쩍 늘었다.

포유동물 중 ‘인간’의 모성은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것이라는 주장은 역사적으로 모성이 다른 방식으로 발현되어 왔다는 사실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아동의 탄생’을 쓴 프랑스 사회학자 필립 아리에스에 따르면 10세기경 화가들은 어린이를 덩치가 작은 성인으로 묘사했으며 중세 때에는 어린이를 작은 악마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는 어린이가 순진무구하고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개념은 근대에 들어서 성립됐고 모성애도 이때부터 강조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18세기 자본주의 진전으로 일터와 주거가 분리된 근대 가족이 형성되면서 남자는 나가서 일을 하고 여자는 가사와 육아를 담당한다는 분업이 이뤄졌다.

아동의 중요성, 자애롭고 무한한 어머니의 사랑도 중요시되기 시작했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과거에는 어머니와 아이의 감정적 결속이 오늘날보다 훨씬 약했다”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유전적 속성이라고 공언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고 했다. 그는 “모성애는 한 사회가 변화하고 있는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미국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가 1935년에 발표한 뉴기니의 세 부족 연구도 모성이 각 사회에 따라 다르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라페시 부족에서는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모성적이었던 반면 먼더거머 부족에서는 아버지 어머니 모두 모성적인 것을 거부했다.

이 부족의 어머니는 성적 욕망과 질시에 가득 차있었다.

또 챔블리 부족에서는 어머니가 생계를 맡고 아이들은 여성들의 유대 속에서 집단적으로 양육되었다.

○ 한국 모성의 변천사

박수근의 그림 '모자'

‘한국의 모성’을 쓴 윤택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강사(인류학)는 “모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어서 시대, 지역, 문화에 따라 다른 어머니 노릇들이 있어왔다”고 설명한다. 그는 모성을 “하나의 사회적 구성물, 그 안에 여성의 생물학적 특징을 포함한 임신, 출산, 육아를 통해 만들어지는 사회적, 문화적 행위”라고 규정한다.

한국의 경우 조선 중기이후에도 여성 교훈서 ‘내훈’의 20장 가운데 어머니

노릇과 관련된 덕목은 2개에 불과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아 대를 잇는, 모성의 도구적 성격이 두드러졌던 것.

또 오늘날 ‘어머니’라고 할 때 흔히들 ‘생모’를 연상하는 것과 달리 당시에는 자식을 낳은 친어머니는 별 의미가 없었다. 윤씨는 “조선시대 가례에는 어머니를 적모 계모 양모 유모 등 8모(八母)로 분류했다”면서 “어머니라는 명칭과 내용도 사회적 구성물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라고 설명했다.

또 현모양처론이 본격화한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강한 어머니’상이 형성됐다.

60, 70년대 산업화와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가사노동과 육아에 전념하며 교육을 통해 자식의 계층상승을 꾀하던 ‘치맛바람 어머니’들이 등장했다.

50, 60년대 베이비붐 세대에 태어난 엄마들은 80, 90년대에는 자녀교육을 위해 전력을 다하면서도 자아실현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갈등적 어머니’들이 나타났다.

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현재에는 전문직도 갖고 있으면서 외모나 몸매 가꾸기, 살림 잘하기, 아이 잘 키우기를 모두 잘하는 ‘신 현모양처’가 새로운 어머니상으로 등장했다.

윤정로 한국과학기술원 교수(사회학)는 “모성이란 어머니 노릇이며 이는 일상적으로는 자식 양육과 정서적 유대로 드러난다”면서 “타고나는 면도 분명히 있겠지만 인간의 모성은 생물학적 기능보다 더 큰 범주이며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부대상 설문조사 "모성부족 자책감 느낀다" 18.4%▼

MBC 라디오 여성시대 행사 참가 주부 523명 응답

모성에 대한 엄마들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위크엔드팀은 지난달 말 MBC 라디오 ‘여성시대’ 주최로 강원 원주시 오크밸리에서 열린 ‘가을나들이’행사에 참가한 주부 6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24∼67세의 주부 523명이 설문에 응답했으며 응답자의 평균 연령은 42세, 평균 자녀수는 1.9명이었다. 이들 중 47%가 전업주부였다.

‘아이가 자신의 인생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느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66.7%가 ‘내 인생만큼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흔히들 전통적 어머니의 대답으로 간주하는 ‘내 인생보다 중요하다 (아이를 위해 나를 희생할 수 있다)’는 응답은 전체의 25.8%였다. 또 6.9%는 ‘내 인생이 (아이보다) 더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다시 태어나면 아이를 낳겠느냐는 질문에는 전체의 11.9%가 아니라고 응답했다. 이 응답은 전업주부 (9.8%)보다 취업주부 (13.4%) 쪽에서 더 높았다.

또 자녀 양육의 의무를 거의 마친 50, 60대에서 ‘다시 태어나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응답이 14%로 30대(11.6%), 40대(11.7%)보다 높았다.

‘아이가 없으면 노후가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전체의 30.6%가 아니라고 응답했으며 이 응답은 50, 60대(14%), 40대 (30.7%)보다 30대(34%)에서 높게 나타났다.

스스로 모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18.4%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특이하게도 ‘모성이 부족하다’는 응답은 전업주부 (20.3%)가 취업주부(16.2%)보다 높았다.

어떤 경우에 모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지 주관식으로 응답하게 한 결과 “화풀이할 때”가 가장 많았다.

또 “외출 시 아이가 어려도 전혀 신경을 쓰기가 싫을 때”(47세·전업주부)나 “내가 아끼는 우산을 아이가 가져가 화가 났을 때”(36세·자영업), “결혼 전 예상과 달리 아이를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 내게 엄마 자격이 있나 의심할 때”(33세·전업주부) 엄마들은 모성이 부족하다는 자책감을 가졌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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