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SNS에서는]회식이란 이름의 가혹행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자, 건배사 한마디 해봐.”

폭탄주를 받아든 직장 상사가 술잔을 치켜들며 입을 엽니다. 회식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직장 동료들은 한껏 기대하는 눈빛으로 술잔을 따라 듭니다. 쏟아지는 시선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온몸을 짓누르지만 두어 개 갖고 있던 ‘필살기’는 이미 써먹은 지 오랩니다. 그렇다고 “제가 ‘○○(회사 이름) △△팀’ 하면 ‘화이팅’ 해주십시오!”라는 식의 무성의한 건배사를 했다간 눈총과 조롱을 받기 십상입니다. 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건배사 앱을 뒤져보지만 ‘시원하게 이끌어주는 오너! CEO!’ 같은 흔해 빠진 건배사뿐입니다. 조급한 마음에 ‘오빠 바라만 보지 마! 오바마!’ 같은 무리수를 던졌다간 자칫 성추행범으로 몰립니다. 상사가 잔을 들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와이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어갑니다.

회식(會食)은 여러 명이 모여 식사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한국 직장인 회식문화는 ‘회식’을 표현할 영어 단어가 없을 만큼 독특합니다. 상사의 자기자랑 듬뿍 담긴 훈계성 일장 연설을 듣는 것도 피곤한데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가라앉으면 어김없이 “누가 분위기 좀 띄워 봐”라며 각종 이벤트를 요구합니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눈을 피하면 어김없이 막내가 지목됩니다. 막내가 트로트 같은 노래를 부르며 우스꽝스럽게 온몸을 뒤틀고 춤을 추면 모두가 겉으론 활짝 웃지만 속으론 안쓰러워합니다. 도무지 누구를 위한 건지 알 수 없는 갖가지 ‘가혹행위’는 상사가 흠뻑 취할 때까지 이어집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회식’과 ‘직장’이란 단어를 넣어 검색해 보면 평범한 직장인들이 회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 가혹행위를 근절하겠다는 건 직장에서 회식 안 하겠다는 말과 똑같다” “직장생활은 회식이 절반, 아부가 절반” “내가 사장 되면 회식부터 없애겠다”는 등 회식을 대하는 직장인들의 한탄과 자조가 가득합니다. “가족이 아프지 않고 회식에서 빠지는 법” 같은 글도 인기입니다.

기업이 운영하는 SNS 계정도 회식에 대한 각종 글을 자주 올립니다. 한 전자기업은 최근 트위터에 ‘직장인, 이런 회식 원한다! 베스트 4!’라며 △1차로 끝내기 △술 대신 문화생활 △맛집 투어 △교외 야유회를 해야 한다고 소개했습니다. 한 대기업은 ‘직장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회식 장소, 명당 찾기’라며 회식 장소를 알려줍니다. 또 다른 대기업은 직원 1800여 명에게 설문조사를 해보니 패밀리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를 가장 선호하는 회식이라며 이를 적극 권장하겠다고 합니다. 단언컨대 회식 자체를 원하지 않는 직장인이 압도적으로 많을 텐데 그 어떤 기업 SNS도 회식을 안 하겠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요즘 직장인들은 회식 자리를 대비해 학원까지 다닙니다. 건배사는 화술을 가르쳐주는 스피치 학원에서 배웁니다. 서울 강남의 한 스피치 학원에 직장인을 위해 개설한 8주짜리 강의에는 건배사 코멘트와 진행 방식, 주의점 등을 가르치는데 인기 만점입니다. 회식이 잦은 연말연시에는 건배사만을 일대일로 과외해주는 강의도 열린다고 하네요. 서울 강북구 미아동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윤민호 씨는 기자에게 “일주일에 한 번꼴로 폭탄주를 멋있게 타는 법에 대해 회사 강연을 다니는데 직장인들이 개별적으로 과외를 문의하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습니다.

개인기는 마술이 가장 인기입니다. 회식자리 개인기가 대부분 춤과 노래이다 보니 겹치는 경우가 많아 차별화를 하려는 거죠. 마술은 짧은 시간에 큰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어느 정도 재미가 보장됩니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마술학원은 수강생 중 직장인이 40%에 이릅니다. 퇴근 시간 이후인 오후 7, 8시 강의는 늘 만원입니다. 개그맨 지망생들이 성대모사 등을 배우기 위해 다니는 학원에도 어김없이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개인기도 직장인의 능력으로 자리 잡은 시대인지라 하나만으론 부족합니다. 남들이 안 하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에 특이한 걸 찾기도 합니다. 요즘은 손으로 물건을 연이어 던지는 ‘저글링’이 인기입니다. 저글링을 잘 배워뒀다가 콩주머니 3, 4개 정도를 늘 들고 다니면 언제든 ‘위기’를 넘길 수 있습니다. 13년째 저글링 수업을 하고 있는 박종언 씨(33)는 “수강생 중 30%는 젊은 직장인인데 매주 한 번씩은 꼭 배우러 온다”고 말합니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국가 중 노동시간이 가장 길다고 합니다. 지금은 정계은퇴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대선 경선 캐치프레이즈로 ‘저녁이 있는 삶’을 내걸어 직장인들의 전폭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거, 그리 어려운 건 아닙니다. 저녁이 있는 삶은 회식이 없는 직장에서 시작됩니다.

조동주 사회부 기자 djc@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