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언의 마음의 지도]가까워도 남입니다, 존중해주세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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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
‘우리’라고 하는 말은 흥미롭습니다. 사전에 의하면 ‘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곳’, ‘자기와 여러 사람을 포함’한 일인칭 대명사, ‘어떤 대상이 자기와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요약하면 모두 소속감이나 친밀감의 표현입니다. ‘남’은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 ‘아무런 관계가 없거나 관계를 끊은 사람’입니다.

나와 남은 낱낱이 다른 딴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개인(個人)이라고 합니다. 철학에서는 남을 타자(他者)라고 부르는데 타자가 지니는 성질을 타자성(他者性)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타자성은 피할 수 없으며,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고유합니다. 나는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알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니 인간 세상을 떠도는 ‘너를 이해한다’는 말은 허망한 말입니다. 진정으로 내가 남을, 남이 나를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정 이해가 안 가시면 김국환이 불러서 유명해진 ‘타타타’를 들어 보시길 권고합니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개인과 개인이 모여 세상이 펼쳐집니다. 일단 모이면 개인은 인간(人間)이 됩니다. ‘인간’이라는 말에는 사회, 세상, 개인에 대한 세상의 평가와 같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자기가 누구와 아주 친하다고 강조합니다. 친밀(親密)하다는 말은 나와 남 사이의 거리가, 물리적인 거리와 심리적인 거리 모두, 빽빽할 정도로 가까운 관계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가 누구와 친밀하게 느낀다는 것은 때로는 함정입니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얼마든지 가깝게 느낄 수 있습니다. 친밀함을 흔히 나와 남 사이가 가까운 정도인 ‘거리’의 문제로 규정하지만 가까이 다가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친밀한 것은 아닙니다. 친밀하다면 나와 남 사이에 감정적인 교류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어야 합니다.

두 사람이 교류를 한다는 것은 나를 남에게, 남이 나에게 각자의 내면세계를 자발적으로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친밀함의 영어 단어(intimacy)는 라틴어가 뿌리인데 원래는 사람의 내면을 강조한 단어였습니다. 그렇게 쓰이다가 원래의 의미가 변하면서 이제는 나와 남 사이의 교류를 더 강조하는 단어로 탈바꿈했습니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들 하는데 과연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일까요? 남과 나의 차이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바탕에 깔려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입니다. 친절한 세상을 강조하는데 단순한 친절이나 공감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입니다. 바람이 늘 불어오는 것도 아니지요. 장애인들에 대한 일시적인 친절보다는 편의시설 확충이 진정한 배려와 존중입니다. 소수자들이 살아가기 좋은 세상은? 나와 남이 다름을 정서적으로 인정하고 행동으로 표현해야 좋은 세상입니다.

타자성과 흔히 혼동하는 개념이 단독성(單獨性) 혹은 국외자성(局外者性)입니다. 단독성이란 단지 나와 남이 차이가 있다는 것 외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지 않고 고유하게 거리를 두고 단독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나와 남이 존재하는 판이 다르니 남의 판을 존중하고 판을 깨지 말라는 뜻입니다. 남의 처지와 입장을 배려하자는 말입니다. 내 입장만 가지고 어설프게 남의 처지를 이해한다고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친절과 공감을 내세우면서 남을 나와 합치거나 종속시키려고 애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와 남 사이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틈을 인정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좋은 세상입니다.

친밀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와 남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경험이 두려움과 불안을 불러옵니다. 어려서 친밀했던 경험이 상처로 남았다면 더욱 그러할 겁니다. 새로운 경험으로 치유가 되어야 하지만 의심과 몰입의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시간이 걸립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기 마련이니까요. 친밀함이 주는 상처도 있습니다. 타자성과 단독성이 존중되지 않으면 개인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마음의 피’를 흘리게 됩니다. 그러니 친밀한 관계가 늘 좋은 관계는 아닙니다. 친구 따라 강남을 갔다가 후회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깊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노자의 도덕경에 의하면 친절, 호의, 돌봄 그리고 명분이 모습을 나타낼 때 그 뒤에는 항상 가면과 거짓이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나와 남의 인간관계에서 타자성과 단독성을 존중하지 않고는 진정한 관계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나를 알고, 남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성숙된 관계가 이루어지고 협업으로 창조적인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남과 내가 다른데도 무리해서 합치려 해서는 부작용만 생깁니다. 열정과 냉정 사이의 균형감이 중요합니다.

타자성과 단독성은, 미국의 저명한 정신분석학자이며 정신분석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메리 시고니 상’을 받은 바 있는, 워런 폴란드 박사의 주장입니다. 그분의 생각에 동양권의 개인, 인간, 제 생각을 더해 풀어 보았습니다. 정신분석 과정을 풀이하는 글이지만 인간 세상의 이치는 다 비슷하게 돌아간다고 봅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
#우리#개인#타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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