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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의 마음의 지도]마지막 날, 조심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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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의 마음의 지도]마지막 날, 조심해야 할 일

이설 기자입력 2017-12-29 03:00수정 2017-12-29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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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다시 한 해가 끝나갑니다. 새로운 한 해가 곧 시작됩니다. 나이 들수록 시간의 흐름이 더 빨라진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새해 인사를 나눈 지가 어제 같은데 며칠 남지 않은 2017년의 날들이 ‘마지막 잎새’처럼 펄럭입니다.

생각해 보면 ‘한 해’라고 하는 것은 인류가 인위적으로 나눈 시간 단위일 뿐입니다. 한 달, 하루, 한 시간, 일 분, 일 초 모두 같습니다. 동식물의 세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봅니다. 나누기는 보통 무엇인가를 통제하려고 하는 짓입니다. 무거운 물건을 나르기 전에 하는 해체도 나누기입니다. 요리책에 나오는 1, 2, 3, 4 순서도 나누어서 하라는 지침입니다. 시간 단위도 나누기의 산물입니다.

세상을 등질 때까지, 100년을 한 단위로 여기며 산다면 어떨까요? 지루하기도 하겠지만 우선, 개인의 삶에서 100년이라는 시간을 한 뭉치로 다루기는 뇌의 정보 처리 능력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둘째, 나누어지지 않은 평생에 주는 학점은 낙제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쁜 일 51%, 좋은 일 49%인 인생의 분류는 실패작입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을 나누면 달라집니다. 올해는 좋지 않았지만 내년은 잘될 것이라는 희망이 생깁니다. 어제는 힘들었지만 오늘은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합니다. 오전은 집중, 오후는 늘어지게 쉬는 융통성도 확보됩니다. 나누기의 지혜는 시간의 무한성을 내 손으로 통제 가능한 유한성으로 바꿉니다. 주중과 주말을, 근무시간과 퇴근 후 시간을 나누어 행복지수를 높입니다. 구분 없이 멋대로 섞인다면 정말 끔찍할 겁니다.

시간 나누기는 상업적으로도 활용됩니다. 연말에 백화점 등이 벌이는 대대적 할인행사는 유한하다는 착각을 소비자들에게 불러일으킵니다. 우리 모두 다 똑같은 행사가 내년에도, 그 뒤에도 계속된다는 명백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2017년 마지막 행사’ 광고는 2018년이 없을 것 같은 환상을 유발합니다. 마음이 급해집니다. 더군다나 사려고 하는 물건이 몇 개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장이 뛰고 혈압이 올라갑니다. 현장으로 갑니다. 사람이 몰릴수록 사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립니다. 그냥 나오면 인생의 실패자로 전락한 느낌이 듭니다. 할인행사 전 1만 원을 할인 후 5000원으로, 반값 가격표는 시간의 전후를 영리하게 비교해 보여줍니다. 홈쇼핑 방송의 ‘남은 시간’ 자막은 더 극적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압박합니다.

연말까지는 꼭 이루겠다는 결심을 많은 사람들이 합니다. 12월 31일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닻 없이 풍랑에 흔들리는 쪽배의 신세가 될 것입니다. 마감일은 마음을 쫓는 사냥개입니다. 새해가 밝은 1월 1일의 역할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난다 해도 첫날 없이는 새로운 출발이 불가능합니다. 새해에는 취직을 하겠다, 돈을 모아서 원하는 것을 사겠다, 낡은 관계는 지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겠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하겠다 등등의 계획 수립은 어려워질 겁니다.

올해 12월 31일과 내년 1월 1일은 단 하루 차이이지만 끝과 시작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느끼는 차이는 엄청납니다. 연말은 뒤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이때 조심해야 합니다. 미처 이루지 못한 일보다는 이미 이룬 일에 집중해서 자존감을 올려야 합니다. 이루지 못한 일은 늘 확대되어 마음을 후벼 팝니다. 연말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교는 슬픔, 불안, 우울의 씨앗이자 열등감을 찍어내는 공장입니다. 올해가 엉망진창이었어도 완전히 망치지는 않았습니다. 실패의 경험은 오래 간직해야 할 좋은 교과서입니다.

올해 안에 미처 이루지 못한 계획이 있다면 12월 31일 이전에 빨리 내년 365일을 더해 2년짜리 계획으로 변경합시다! 마음이 편해집니다. 단, 새해 할 일은 한 해가 아닌 월별로 나누어, 미루지 말고 단계별로 마치도록 합니다.


연말에 버리고 갈 것은 자신의 삶에 점수를 매기지 못해 안달하는 버릇입니다. 연말연시만이라도 ‘멍 때리며’ 살아봅시다. 출연자들이 순위를 다투며 경쟁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시청을 피하길 권합니다(관계자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합니다). 맥주를 마시고 닭튀김을 먹으면서 넋을 놓고 보아도 상을 타거나 출연료를 받는 사람은 어차피 남이고 내가 아닙니다. 비교만 되고 살만 찝니다. 대리만족? 어렵습니다! 깊이 있게 제작된, 삶의 고뇌를 다룬 다큐멘터리 시청을 추천합니다.

정 힘들면 그저 살아서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합시다. 후회와 우울감이 불쑥 올라올 때 복식호흡을 하면 도움이 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새해 계획 수립에도 너무 애쓰며 매달리지 맙시다. 어차피 구체적인 실행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혼돈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정돈하는 목적이 더 크다고 봅니다. 대강 하도록 합시다. 목록 몇 개만 만들면 ‘시작이 반!’이라는 착각에 빠져 마음이 편해집니다. 종이에 크게 적어 눈앞에 붙여 놓으면 한동안 동기부여도 됩니다.

하루 24시간, 한 달 약 30일, 한 해 365일이라는 시간 단위는 결국 삶의 경험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우리의 치열한 몸부림입니다. 하나씩 올라가는 계단과 같이 다음 층에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릴까 하는 궁금증 겸 두려움, 다시 한 번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의 삶이 두려움과 희망의 비빔밥이라면 잘 비벼야 맛있습니다. 아니면 한쪽은 고추장이 몰려 너무 맵고, 다른 쪽은 대책 없이 싱거워서 먹기가 거북할 겁니다.

하루 한 장씩 뜯을 수 있는 일력을 좋아합니다. 새해 첫날을 보내고 한 장을 뜯어도 무려 364장이 남습니다. 365일을 한 장에 몰아 한눈에 보이도록 친절하게(?) 찍어 낸 종이를 보면 광속으로 엄습해 오는 공황을 애써 막아야 합니다. 비슷한 이유로 전자수첩보다는 종이수첩을 선호합니다.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고 여기저기 쉽게 넘겨 볼 수 있으며 전기 없이도 작동하고, 자손들에게 기록으로 남길 수도 있습니다. 혹시 유명해지면 박물관에 보존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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