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언의 마음의 지도]공감의 결여와 과잉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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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보근 기자 paranwo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보근 기자 paranwon@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집 근처에 작은 공원이 있습니다. 저는 공원을 통과하는 오솔길로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합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개를 데리고 제 앞에 누가 걸어옵니다. 큰 개는 아니지만 어쩐지 두렵습니다. 길가로 피해 가만히 서 있습니다. 갑자기 개가 내게 달려듭니다. 개 주인은 그제야 겨우 목줄을 자기 쪽으로 당깁니다. 놀란 저를 쳐다보면서 그 사람이 말합니다. “우리 개는 물지 않아요!” 말문이 콱 막힙니다. 물론 그 개가 개 주인을 해치지는 않겠지요. 정신을 차리자 제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오려 합니다. 긴급하게 초자아를 발동시켜 스스로 말문을 막습니다. 지나고 나니 후회가 됩니다. 다음에는 제대로 따져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요새 많이 걸어 다닙니다. 자동차보험료를 상당히 돌려받을 희망에 부풀어 있습니다. 걷다 보면 운전 중에는 놓치는 거리의 풍경이 자세히 보여 즐겁습니다. 단점도 있습니다. 정신 놓고 있으면 다른 사람과 부딪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큽니다. 풍경에 정신 팔린 제 어깨를 휴대전화에 몰입한 사람이 치고 말없이 멀어져 갑니다. 사람 다니는 길인 인도 위를 당당하게 질주하는 자전거에 치일 뻔한 적도 있습니다. 나라에서 정한 우측통행이 정착이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릴지 전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길거리는 나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기애(自己愛)로 넘쳐납니다.

지하철역, 상가, 공공건물의 실내도 예외가 아닙니다. 에스컬레이터 손잡이는 꽉 잡고 가방은 몸 앞으로 바짝 당겨야 합니다. 어떻게나 바쁘신 분들이 많은지 재수 없으면 밀쳐져서 2, 3층 높이에서 넘어지면서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에스컬레이터 앞 공간에 서서 바쁜 일(?)을 보시는 행동도 지양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승강기는 좀 나을까요? 내리기도 타기도 힘듭니다. 안의 사람이 우선 내려야 밖의 사람이 쉽게 편안하게 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많은 사람이 부정합니다.

걸어 다니기나 대중교통 이용의 경험이 불쾌해서 내 차를 몰고 거리로 나갑니다. 어떻게 될까요?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요? 신기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축적해 온 공간 개념은 걸어 다녀도,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자가용을 운전해도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차 역시 욕망의 화신입니다. 보행자의 복사판입니다. 신호 없이 아무데서나 멈추고, 서있고, 끼어들고, 갑자기 돌아섭니다. 저는 한때 모든 사람에게 자동차처럼 방향지시등이나 브레이크 등을 의무적으로 달게 하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발칙한 생각은 이미 접었습니다. 공장에서 만들어낸 자동차 장치들도 제대로 쓰지 않는 현실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겁니다.

사람들이 점점 공감 능력을 잃어가는 듯 보입니다. 내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나는 일에는 경탄스러울 정도로 매우 예민하게 굴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에는 너무나 둔감합니다. 간혹 자신에게 바다처럼 너그러운, 얼굴 두꺼운 사람들도 보입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사는 멋있는 삶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고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존재입니다. 생존을 위해 그렇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평안하게 살려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도 키워서 써야 합니다. 공감 능력은 저절로 생기지 않고 가정, 학교, 사회, 국가가 키워내야 합니다. 공감은 교육과 훈련의 결과물입니다. 공자님 말씀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공감(共感·함께 공, 느낄 감)은 어렵습니다. 남이 느끼는 감정을 그 사람의 내면에 들어가서 나도 느끼는 것이니 당연히 어렵습니다. 남과 거리를 두고 경계를 지키면서 남을 딱하고 가엽게 여기는 동정(同情)보다는 한 수 위입니다. 동정보다는 공감이 더 깊숙한 감정입니다. 동정은 떨어져서 하는 짐작이고, 공감은 다가서서 하는 경험입니다.

공감 능력은 대인관계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다면 원만한 대인관계는 물 건너갑니다. 공원에서 평화롭게 걸어가던 제게 갑자기 짖으며 달려든 개에게 그 순간 제가 느낀 공포심을 개 주인이 공감했다면? 공감은커녕 동정에도 못 미치는, 그런 무심한 말을 그 사람이 뱉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사람은 그저 자기가 처한 입장을 방어하기에 급급했던 겁니다. 당황스러운 입장이었던 점은 인정합니다만….

공감은 내 마음이 다른 사람 마음 안으로 잠시 들어가 보는 능력입니다. ‘잠시’라고 말하는 이유는 공감을 지나치게 느끼다가 상대방의 감정에 휩싸여 나의 정체성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 빈곤 상태인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이 평생을 거기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보고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지나치거나 죄책감이 지속되면 마음의 균형이 깨져서 심한 우울증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나친 공감의 부작용은 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너무 공감하고 그 사람의 처지에 몰입해서 느끼고 행동하다가는 그 사람에게 오히려 폐가 됩니다. 상대방이 자유 의지로 살아가는 방식을 간섭해서 침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 자신의 삶이 아닌 나를 위한 삶이 되어 상대방의 정체성을 위협하거나 망가뜨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늘 옷을 입고 지냅니다.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를 가리기 위해서입니다. 옷을 입었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물리적으로 적절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공간적으로 너무 붙어 있어도, 아주 떨어져 있어도 서로에게 불편합니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공감의 결여로 너무 멀어지면 관계는 소멸되고 외톨이가 됩니다. 공감의 과잉으로 너무 가까워지면 내가 남이 되고 남이 내가 되어 구분이 안 되는 혼돈 상태가 벌어집니다. 마음의 거리를 지키는 일은 몸의 거리를 지키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는 ‘거울’인 공감 능력은 아주 밝아도 너무 어두워도 좋지 않습니다. 평소에 잘 닦아서 적절하게 밝은 해상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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