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525회…셔플 XⅥ 탑 또는 신의 집 (4)

  • 입력 2004년 3월 14일 17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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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큰오빠는 밀양을 떠나 부산과 서울을 전전하다가, 1947년에 소요 지도 혐의로 검거되었습니다. 우리 집에도 경찰서장과 군수가 찾아와 큰오빠의 행방을 추궁하였지요. 큰오빠와 함께 조국을 위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던 여운형 선생이 암살되자, 우리 가족은 큰오빠의 안위를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큰오빠는 1948년 4월 9일, 김구 선생과 남북연석회의에 출석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해 그대로 북에 머물러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검열상에 올랐습니다. 큰 오빠는 올케 언니와 두 사내아이만 데리고 갔고, 우리 가족은 북으로 간 것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좌익 빨치산 네 명이 체포, 기소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집에서 쫓겨나 삼문동의 다 쓰러져가는 집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귀향하여 우리 가족에게 눈부신 빛을 선사하였던 큰오빠가 되레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우리 가족 한 명 한 명을 뒤덮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들 모두 말수가 적어졌습니다. 나는 공포에 떠는 시간을 어떻게든 무마해 보려고 큰오빠가 준 연필을 꼭 쥐고 일기를 썼고, 한 글자 한 글자에 맹세를 담았습니다. 열여덟 살 때부터 마흔여덟 살 때까지 30년을, 조국 광복을 위해 일제와 싸운 큰오빠처럼 되겠습니다, 하고.

용봉, 봉기, 구봉 오빠는 경찰서에 연행된 후로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공산당 선언’도 엥겔스의 ‘공상에서 과학으로’도 읽은 적이 없고, 데모 행렬에 참가한 적조차 없는데, 김원봉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 죽임을 당한 것이죠. 그 찬란했던 2월 28일에서 불과 2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두 손을 높이 쳐들고 김원봉 장군 만세를 외쳤던 사람들이 같은 손으로 우리를 붙잡아 죽였던 것입니다.

나는 여덟 번째 오빠 덕봉과 같이 연행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들이, 이 아이는 겨우 열일곱 살, 아무것도 모르니 용서해 달라고 울면서 매달렸지만 사찰계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걷어차 냈습니다.

나카노 공장은 일제 때 나카노란 일본 사람이 세운 직물공장입니다. 재봉틀과 베틀은 전부 구석에 쌓여 있습니다. 흙바닥에 멍석이 깔려 있을 뿐 이불도 담요도 없습니다. 창문도 딱 하나, 문도 딱 하나. 창문과 문 앞에는 권총을 쥔 경관이 하루 스물네 시간 지키고 있습니다.

글 유미리

번역 김난주 그림 이즈쓰 히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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