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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산성 버리고 남원성” 明장수 하책에… ‘피의 살육’ 막지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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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산성 버리고 남원성” 明장수 하책에… ‘피의 살육’ 막지못해

안영배 전문기자 입력 2017-08-19 03:00수정 2017-08-1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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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쟁 ‘정유재란’<7>
7화: 호남이 무너지다
둘레 2.5km, 높이 4m로 네모반듯한 평지성인 남원 읍성. 사진은 남원성 서북쪽 성벽(하단) 상공에서 내려다본 남원 시내. 남원=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게 대승을 거둔 왜군은 호남 내륙 유린을 본격화했다. 그해 8월 한가위 무렵, 진주와 구례를 분탕질한 일본 좌군(左軍)은 섬진강을 거슬러온 수군과 연합해 남원성으로 진격했다. 일본 우군(右軍)이 함양의 황석산성에서 백성들을 도륙하던 시기였다.

현재 전북 남원시 외곽에 있는 KTX 남원역이 아닌 구(舊) 남원역이 바로 420년 전 정유재란 당시 조선군과 왜군의 혈투가 벌어졌던 남원성 북문자리였다. 남원성은 둘레 2.5km, 높이 4m의 돌 성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었다. 네모반듯한 형태의 평지성으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중국식 읍성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남원성은 정유재란 때 왜군의 공격으로 성의 상당 부분이 훼손됐다. 그나마 남아 있던 성벽과 유적마저 수백 년 후 왜군의 후손들에 의해 또 파괴됐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그들에게 불리하거나 좋지 않은 기억을 남겨준 조선의 유물과 유적을 철저히 파괴하거나 은폐했다. 일제는 남원성 북쪽과 서쪽 성벽을 관통하는 철도인 전라선을 설치하면서 북쪽 성벽의 북문에 남원역을 건설했다. 조선군과 조선 백성들이 왜군에게 대항하다 처절하게 몰살당한 북문 자리에다 남원역을 세움으로써, 기차의 쇠바퀴와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의해 역사의 현장이 짓밟히도록 했다는 게 남원 향토사학계의 주장이다.

그도 모자랐던지, 일제는 북문의 조선인 순국 현장과 그 바로 인근에 조성해놓은 만인의총(萬人義塚) 묘역이 서로 연결되지 못하도록 했다. 둘 사이에 역사와 플랫폼을 건설하는 방법으로 교묘히 차단시킨 것. 만인의총은 남원성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성민(城民)들이 북문 옆 큰 구덩이에 시신들을 묻어 조성한 ‘1만 명의 의로운 무덤’이었다. 일제는 이 묘역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는 동시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역사 뒤쪽으로 놓이게 했다고 한다.

1964년 만인의총은 남원성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는 사당인 충렬사와 함께 왕봉산 기슭으로 이전됐다. 그래서 원래의 만인의총은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없으며 흔적만 남아 있다. 일제는 왜 420년 전 자신들의 조상이 승리한 남원성 전투 현장을 그토록 가리려고 했을까.

조선을 무시한 명나라 장군

“너희 나라(조선) 사람들은 본래 겁이 많아서 적군만 보면 도망해 흩어지기에 여념이 없다. 후일에도 만일 다시 이런다면 내가 직접 그들의 목을 벨 것이다.”(‘선조실록’)


일본의 정유년 재침이 시작된 지 석 달 정도 지난 1597년 5월, 일착으로 조선에 도착한 명나라 파병군의 부총병(副摠兵) 양원이 조선 대신들에게 거침없이 퍼부었다. 대신들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외국 장군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재조지은(再造之恩·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의 명나라 장군 앞에서 선조 임금 역시 쩔쩔 맸다. 양원은 선조 앞에서 남원성을 굳게 지켜 “전라도 하나는 금성탕지(金城湯池·끓는 못에 둘러싸인 무쇠 성)의 견고함이 있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선조실록’)

남원은 경상 전라 충청의 3개 도를 잇는 교통 요충지여서 아군이나 적군 모두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전략 거점지였다. 조선에 파병된 명군이 제일 먼저 남원성으로 달려간 것도, 남원을 뺏기면 전라도와 충청도는 물론 경기도까지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그해 6월 남원성에 도착한 양원은 성내 용성관(龍城館)에 본부를 설치한 뒤 공성전을 준비했다. 양원은 성벽을 한 길(丈) 이상 더 높이 쌓아 올리고, 성문마다 대포 두세 대씩을 설치했다. 성을 두르는 해자(城壕)도 더 깊게 파놓는 한편으로, 성벽과 해자 사이에 또 다른 방어시설인 양마장(羊馬墻·흙과 돌 등으로 쌓은 울타리)을 신설해 총혈(銃穴·총구멍)과 포혈(砲穴·포 구멍)까지 뚫어 놓았다. 이중삼중으로 성을 보호하는 전형적인 중국식 방어 기술이었다.

조선은 원래 평지성인 남원성보다는 산성인 교룡산성에서 왜군과 싸우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적이 점령지에서 군량, 무기, 식수, 시설물 등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미리 없애버려 적을 지치게 하는 청야전법(淸野戰法)이었다. 대신 군량과 물자 등을 산성에 옮겨놓고 농성전을 벌이는 것이다.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도 산성이 평지성보다 효과적이었다. 함양의 황석산성은 성을 완전히 보수하기도 전에 왜군이 들이닥쳐 함락됐지만, 교룡산성은 지형이 험준하고 성벽도 이미 튼튼하게 증축돼 있었다.

그러나 양원은 남원성을 고집했다. 양원은 조선 관료와 장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룡산성에 비축해둔 무기와 식량 등을 모두 남원성으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이 때문에 남원의 민심이 동요돼 성을 떠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조선인들은 양원의 전략을 미덥게 보지 않았다. 그래도 양원은 “나의 계획을 변경시키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까지 선언했다.(‘선조실록’)

길가에 모래알처럼 널린 백성들의 시신

1597년 8월 한가위 무렵, 육군 5만 명과 수군 8000명으로 구성된 일본 좌군은 남원성을 두 겹 세 겹으로 에워쌌다. 이에 비해 남원성의 조명연합군은 성을 지키기에 턱없이 부족한 병력이었다. 명군은 양원이 이끄는 요동군(遼東軍) 3000명이 전부였다. 게다가 요동군은 단검과 곤봉(몽둥이) 등 근거리 육박전에 익숙한 부대로, 왜군의 조총과 화포 앞에서는 별 힘을 발휘하기 힘든 군대였다. 왜군과의 전투 경험도 없었다. 조선군 사정은 명군보다 더 열악했다.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조선군은 1000명을 밑돌았다. 여기에 비전투인력인 조선 백성 6000여 명을 합쳐봐야 1만 명 수준이었다.

8월 13일부터 전투가 시작됐다. 양원의 총지휘 아래 남원성의 4개 성문을 장수들이 하나씩 맡았다. 동문은 이신방, 서문은 모승선, 남문은 장표 등 명나라 장수들이 맡고, 북문은 전라병사 이복남이 방어했다. ‘징비록’은 남원성 최후의 치열했던 전투를 이렇게 묘사했다.

“8월 15일, 성 위에서 내려다보니 왜적들이 잡초와 벼를 베어 큰 다발을 수없이 만들어 담벼락 사이에 쌓아놓고 있었다. 이것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밤이 되자 갑자기 적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서 부산하게 움직이더니 일제히 포 사격을 시작했다. 성 위로는 탄환이 우박 떨어지듯 쏟아졌다. 성 위 군사들은 모두 목을 움츠리고 쳐다보지도 못했다. 한두 시간쯤 지났을까. 조용해져서 성밖을 쳐다보니 묶어 놓았던 풀다발들로 해자(호)가 다 메워진 후였다. 또 양마장 안팎에도 풀다발이 무더기로 쌓여 이미 성과 비슷한 높이에 이르고 있었다. 적들이 이것을 이용해 성을 넘어오자 성안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졌다.

이미 성안 곳곳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말을 탄 명나라 군사들이 한꺼번에 성문을 나가려고 했으나 굳게 닫혀 있는 문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자 한꺼번에 쏟아져 나갔다, 그러나 밖에서는 왜적들이 두 겹 세 겹으로 둘러싼 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명나라 군사들은 고개를 내어 칼을 받는 꼴이 되고 말았으며 달까지 밝아 적의 칼을 피해 달아난 사람은 불과 몇 되지 않았다.”

남문 밖 양마장을 지키던 김효의가 겨우 빠져나와 유성룡에게 생생하게 보고한 말이었다. 사나흘에 걸친 전투의 결과는 참혹했다. 명나라 장수 이신방, 장표, 모승선 등이 모두 전사했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양원은 간신히 몸을 피했다. 양원이 탈출한 뒤 수행 인원을 조사해보니 117명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모두 전사했다.

명나라 군대가 지키던 성문이 모두 무너지자 북문을 지키던 조선군과 조선 백성은 성 안팎으로 포위돼 버렸다. 결국 전라병사 이복남이 단안을 내렸다. “이제 우리의 갈 길을 갑시다.” 이복남과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구례현감 이원춘은 기름을 부은 시초(柴草) 더미 위에 올라서더니 불화살을 쏘도록 했다. 바람이 불어 불길이 맹렬한데, 네 사람의 장수는 불길 속에서 태연하게 순국했다. 피 묻은 대검에 7색 무지개가 찬란할 정도였다. 군기고를 지키고 있던 감관 박기화는 “성중의 군기(軍器)를 어찌 적에게 넘겨줄 수 있는가”하고 무기를 화약고 속으로 운반한 뒤 불태우면서 자신도 그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호남절의록’)

이런 광경을 바라보던 군사들은 일시에 통곡하면서 적중으로 뛰어 들어가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남원 부사 임현, 당장(唐將·명군 장수) 접반사 정기원, 교룡산성 별장 신호 등도 순절했다.(‘정유재란사지’) 당시 순절한 이들은 후에 8충신으로 선정돼 국가의 추모를 받았다.

가장 큰 희생은 백성들의 몫이었다. 이 전투 현장에 있었던 일본인 종군 의승(醫僧) 케이넨(慶念)은 “성내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사람이 없다(1597년 8월 16일 기록)” “날이 밝아 남원성 주위를 보니 길가에는 죽은 사람이 모래알처럼 널려 있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었다(1597년 8월 18일 기록)”며 남원성의 참상을 일기로 남겼다.(‘朝鮮日日記’)

도망간 명군 지휘자들

한편 양원이 살아난 것을 두고 뒷말이 많았다. 양원은 남원성 서문을 공략하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밀약을 맺어 성을 비워주는 대신 자신의 죽음만은 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유성룡도 “왜적들이 양원인 줄 알면서 짐짓 달아나게 했다”는 전언(傳言)을 ‘징비록’에 남겼다. 그 때문인지 명나라 조정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그를 참수한 뒤 머리를 조선에 보냈다. 조선이 알아서 처분하라는 조치였다. 조선 조정은 양원이 임진왜란 때 평양성에서의 공적이 있다는 점을 평가해 그의 혼을 위로하고 제사를 지내 주었다.

비록 용렬한 작전을 세운 바람에 조선과 명나라의 수많은 목숨을 잃게 한 양원이었지만, 그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양원은 남원성이 고립되자 인근에 구원병을 여러 차례 요청했었다. 명나라 제독 마귀가 유격장 진우충에게 병력 2000명을 거느리고 전주성을 지키다가 유사시 남원성을 도우라고 지시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왜군이 쳐들어오자 진우충은 양원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진우충은 남원성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전혀 움직이지 않다가, 왜군이 전주성으로 쳐들어올 때 도망가 버렸다. 진우충은 이후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하는 ‘입공자효(立功自效)’의 가벼운 문책만 받았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양원보다 진우충의 죄가 더 크다고 보아 불만을 표했다.(‘선조실록’)

남원의 진산(鎭山)인 교룡산 중턱의 교룡산성 동문(위 사진). 남원성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1만 명의 의로운 무덤인 만인의총과 그 넋을 기리는 충렬사. 박영철 기자
기자는 남원성의 남아 있는 성벽을 살펴본 후 남원성에서 서북쪽으로 2km쯤 떨어진 교룡산성을 찾았다. 교룡산성은 교룡산(518m) 중턱에 세워져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황석산성 못지않게 산세가 험했다. 교룡산성 동문은 경사진 언덕에 견고한 옹성이 둘러져 있고, 그 안쪽에 홍예문이 세워져 있었다. 지형적으로도 아군이 왜군을 맞서기에 유리한 곳이라고 판단됐다.

만일 4000여 명의 조명 연합군이 교룡산성에서 버텼다면 왜군이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외부의 지원군이 오면 성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남원성에서 스러져간 1만여 생명의 참혹한 죽음을 피하고 호남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420년 전 남원 땅에서 벌어진 비극 앞에서 안타까움이 꼬리를 물었다.

남원=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정유재란#남원성#교룡산성#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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