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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64〉침선비의 솜씨가 제법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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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64〉침선비의 솜씨가 제법이군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입력 2018-08-28 03:00수정 2018-08-28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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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소장
“관청의 여종이나 기생에게 바느질을 시키면 안 된다. 부득이 남의 손을 빌려야 한다면 침비(針婢)를 부르거나 침가(針家)에 가져가서 삯을 주고 맡겨라.”

―정약용 ‘목민심서’

관청 소속 여종과 기생은 본연의 업무가 있으므로 사적인 일을 시키면 안 된다. 바느질감이 있거든 ‘침비’나 ‘침가’에 맡겨야 한다. 침비는 침선비(針線婢), 바늘과 실을 다루는 여종이다. 침모(針母)라고도 한다. 침선비는 본디 왕실의 의복을 전담하는 상의원(尙衣院) 소속 노비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화려한 옷은 이들이 만든 것이다. 바느질뿐 아니라 재단, 재봉, 자수, 다리미질까지 도맡았다. 장인으로 대우하여 침선장(針線匠)이라 부르기도 했다. 부잣집은 으레 전속 침선비를 두어 의복의 제작과 관리를 맡겼다.

침선비를 따로 둘 형편이 못 되면 ‘침가’라고 하는 삯바느질집을 이용했다. 삯바느질은 가난한 양반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었다. 생계가 어렵기로서니 양반 여성이 밖에서 남자들과 부대끼며 일하는 건 그네들의 도덕관념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삯바느질은 집에서도 할 수 있으니 문제없다. 바느질은 당시 여성의 기본 소양이었다. 제 손으로 바느질할 필요가 없는 양반 여성들도 시집가기 전에 모두 바느질을 익혔다. 남편의 실직을 대비한 일종의 직업 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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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감도 넉넉했다. 옷가게가 따로 없던 시절이다. 옷이 필요하면 직접 만들거나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일자리가 필요한 여성들은 이 틈새를 파고들었다. 솜씨 좋은 사람은 ‘선수(善手)’로 불렸다.

삯바느질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당한 집중과 인내가 필요하다. 이탈리아 장인 못지않게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야 한다. 가사노동도 병행해야 하니, 잠자는 시간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북학의’ 저자 박제가는 열한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박제가의 공부를 뒷바라지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박제가는 회고했다. “등불을 켜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새벽닭이 울도록 주무시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 삯바느질 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장애인 여성도 삯바느질 덕택에 당당한 사회인으로 살아갔다. 조수삼의 ‘추재기이’에는 손가락이 모두 붙어 물건을 쥘 수 없는 장애인 여성이 등장한다. 선천적 ‘합지증’이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발가락이 가늘고 길어서 발을 손처럼 사용했다. 밖에 나갈 때는 손에 신발을 끼우고 물구나무를 서서 걸어 다녔다. 이 때문에 ‘거꾸로 다니는 여자(倒行女)’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손으로도 놓기 어려운 자수를 발로 놓았다. 조수삼은 시를 지어 연민과 존경을 함께 보냈다. “거꾸로 사는 인생도 고달플 텐데, 등불 앞에 앉아서 자수를 놓네(顚倒人生猶作苦, 箕踞燈前刺繡針).”

1970, 80년대만 해도 박제가의 어머니처럼 삯바느질로 자식 공부를 뒷바라지한 어머니는 드물지 않았다. 허생의 아내처럼 무능력한 남편 대신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는 여성도 많았다. 가난한 여성치고 삯바느질 경험이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삯바느질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렸는지 모른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침선비#침비#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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