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자 김훈과 영화감독 황동혁 ‘남한산성’을 말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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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 “치욕의 역사도 알아야… 쓰는 내내 괴로웠다”
황동혁 감독 “당시와 지금 상황 닮아… 타산지석 됐으면”

‘남한산성’ 원작자인 김훈 작가(왼쪽)와 황동혁 감독. 김 작가는 “지금은 북핵, 사드 등 안보와 관련된 외교 문제로 병자호란 때보다 100배는 더 힘든 상황인 것 같다. 정확한 현실감각과 시대감각을 갖춘 이들이 보다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황 감독은 “외교와 정치를 책임지는 분들이 영화를 많이 봐주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남한산성’ 원작자인 김훈 작가(왼쪽)와 황동혁 감독. 김 작가는 “지금은 북핵, 사드 등 안보와 관련된 외교 문제로 병자호란 때보다 100배는 더 힘든 상황인 것 같다. 정확한 현실감각과 시대감각을 갖춘 이들이 보다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황 감독은 “외교와 정치를 책임지는 분들이 영화를 많이 봐주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살면서 본 영화가 10편도 안 된다’는 60대 소설가와 40대 영화감독.

별 공통점 없는 조합이다. 두 사람을 묶어준 건 380년 전의 역사, 병자호란이다. 지난겨울, 둘은 남한산성에서 처음 만났다. 촬영 현장에서 악수 한 번 한 게 전부였지만 이들 사이에는 묘한 ‘동지애’가 흘렀다. 다들 기억하고 싶지 않아 하는 굴욕과 패배로 점철된 역사를 각자 글로, 영화로 표현해냈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 ‘남한산성’의 김훈 작가(69)와 소설을 영화화해 최근 300만 관객을 넘어선 황동혁 감독(46)을 10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영화와 문학 담당 기자가 함께였다.

○ 영화 문외한과 소설광

김훈 작가는 영화와 담을 쌓고 살았다. 폐소공포증이 있어 영화 자체를 즐기지 않는다.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20년 전 개봉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1998년)일 정도.

“캄캄해서 극장에 못 가요. 이번에 가보니 다들 팝콘은 왜 한 사발씩 끼고 앉았는지(웃음). 전 오직 책과 음악, 그림으로만 문화생활을 하는 전형적인 구세대죠. 기껏 본 영화라곤 이승만 전 대통령 찬양 영화나 6·25 반공영화가 전부고. 우리 세대의 낙후함이랄까요.”(김)

반면 황동혁 감독은 어릴 때부터 소설에 빠져 살았다. 공지영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도가니’(2011년)도 그의 작품이다. ‘도가니’ 흥행 이후 사무실에는 “영화화를 검토해 달라”는 소설들이 쌓였다.

“다른 소설은 의욕이 안 생기는데 ‘남한산성’은 읽자마자 ‘아, 내가 영화를 시작한 이유가 이걸 만들기 위해서구나’ 싶었죠. 묘사해 놓은 캐릭터와 쏟아내는 말이 처절하지만 철학적이고, 또 시적이더라고요. 풍경도 아름답되 날이 서 있고…. 저한테 선물 같은 영화예요.”(황)

○ 굴욕의 역사

병자호란에는 임진왜란 같은 통쾌한 승리담도, 이순신 같은 영웅도 없다.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심정이 괴로웠다”고 했고, 감독은 “소설과 실화의 무게를 동시에 지니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그럼에도 굳이 아픈 역사를 꺼낸 이유가 뭘까.

“우리나라는 자존과 영광 중심으로만 역사가 쓰였어요. 치욕과 패배, 그것을 극복하는 민족의 노력은 거의 보여주지 않아요. 독자와 관객도 그런 역사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고요. 제 책도 이렇게 많은 독자가 읽을 거라 생각 안 했어요. 70만 부가 넘으면서 ‘진실하게 이야기를 하면 독자도 알아주는구나’ 감사했죠.”(김)

“극장에 뭔가 잊으러 가기도 하지만 배우러 가기도 하잖아요. 당시와 지금 상황이 너무나 닮아 타산지석으로 얘기해 볼 만하죠.”(황)

서로의 작품에서 가장 와 닿는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최명길의 갓 뒤로 청나라 기마부대가 몰려오는 장면을 꼽았다.

“비극적 구도를 한눈에 보여줘요. 갓으로는 군대를 막을 수가 없는데 조선은 그 갓에 힘이 있다고 생각한 거죠. 사소하고 일상적이지만 그 안에서 힘과 희망이 느껴지는 장면들도 좋았고. 난 그런 문장을 못 썼는데 감독은 넣었더라고. 하하.”(김)

“단연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죠. 대부분의 대사도 책 구절을 거의 그대로 살렸어요.”(황)

○ 서날쇠와 이시백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옆에서 “살 길과 죽는 길은 포개져 있다”며 거드는 작가에게 당대를 살았더라면 최명길과 김상헌 중 누구의 길을 갔을지 물었다. ‘정치적(?)’ 대답이 돌아왔다.

“난 서날쇠의 편입니다만. 그만이 삶의 길을 현실적으로 아는 사람이에요. 나라보다 자기 자식, 논두렁이 중요한 게 현실이거든요. 생업이 애국이 되게끔 만드는 게 위정자의 역할이죠.”(김)

“마음만은 수어사 이시백이 되고 싶네요. 휘둘리지 않는 게 멋있잖아요!”(황)

두 사람을 엮어준 남한산성을 함께 걸을 계획은 없는지 물었다. 훈훈한 대답을 기대했건만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인지 사뭇 냉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에이, 안 가요. 책 쓰면서 하도 가서 남한산성의 개미집이 어디 있는지 다 알 정돈데.”(김) “저도 그만 갈래요. 영화 때문에 너무 많이 거닐어 당분간 좀 그만 가고 싶어요.(웃음)”(황)
 

●제작사 대표는 김훈의 딸 지연씨

영화 ‘남한산성’ 제작사인 싸이런픽쳐스의 김지연 대표(42·사진)는 원작 소설을 쓴 김훈 작가의 딸이다. 서강대 불어불문학과를 나온 김 대표는 2001년 싸이더스에 입사해 ‘말죽거리 잔혹사’ ‘늑대의 유혹’ 등을 홍보하다 2008년 사무실을 차렸고 ‘10억’을 제작했다.

김 작가는 함께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딸에 대해 ‘쿨’ 하면서도 은근한 애정이 묻어나는 특유의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딸 얼굴, 잘 못 봐요. 며칠씩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많고 해외에 갈 때도 인천공항에서 ‘지금 어느 나라에 간다’며 전화로 알리는 스타일이거든요.”

김 대표가 소설 ‘남한산성’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제안했을 때 김 작가의 첫마디는 이랬다. “너 얼마 내놓을래?” “통념에 맞게 드리겠다”는 게 김 대표의 응수였다.

딸이라 혜택을 준 게 아니냐고 묻자 김 작가는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 “내가 아주 싫어하는 게 ‘친인척 비리’예요.(웃음) 돈은 아직 덜 받았어요. ‘고것’이 까다로워서….(웃음) 난 영화 제작에는 일절 관여한 적이 없어요. 영화에 대해서는 철저히 원작자와 제작자의 관계일 뿐이에요.”

김 작가는 딸을 옆에서 지켜보며 영화 제작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실감했다. 그는 “저렇게 고된 걸 왜 하나 싶은데 신바람 나서 하는 걸 보면 좋아서 일하는 게 느껴진다”고 했다. 어려운 일을 하는 딸이 염려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고것이 워낙 잘 챙겨먹고 돌아다녀서 걱정은 안 해요. 부하도 얼마나 많은데요. 나는 부려먹으려고 해도 나 혼자밖에 없어요.”(웃음)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김 작가의 표정에서 푸근함이 전해졌다. 영락없는 아빠 미소였다.

장선희 sun10@donga.com·손효림 기자
#남한산성#김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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