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 기자의 히트&런]이치로 닮고 싶다는 아들 정후야, 난 섭섭하지 않구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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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놀땐 노는 천재형이라면 그는 야구밖에 모르는 노력형 … 너를 좌타자로 만든 데도 영향 끼쳐… 너의 야구는 이제 걸음마지만 나를 넘을수 있다 너도 노력형이니”

“이치로 같은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3년 전이었다.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한 휘문고 1학년 이정후(19·넥센)에게 “어떤 선수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일본인 선수 스즈키 이치로(44·마이애미)라고 답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아버지 이종범(47·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였다. 하지만 이종범이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를 펄펄 날아다니며 전성기를 구가할 때 이정후는 너무 어렸다. 야구가 뭔지를 알기 시작할 무렵 이종범은 선수로서 이미 하향세를 보이고 있었다. 반면 이치로는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었다. 이정후가 아버지의 진면목을 알게 된 건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예전 프로야구 영상을 본 이후다. 이종범은 “그때 아들이 처음으로 ‘아빠, 정말 대단했었네’라고 하더라”며 웃었다.

넥센 신인 이정후가 8일 두산 유희관을 상대로 친 프로 데뷔 후 첫 홈런 공. 넥센 제공
넥센 신인 이정후가 8일 두산 유희관을 상대로 친 프로 데뷔 후 첫 홈런 공. 넥센 제공
그렇다고 ‘롤 모델’이 달라지진 않았다. 넥센 신인으로 올해 KBO리그에서 큰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이정후의 우상은 여전히 이치로다. 8일 두산전에서 ‘신인 이종범’보다 10경기나 빠른 프로 7경기 만에 홈런, 그것도 2개의 홈런을 쳐 낸 뒤 이정후는 “어딜 가나 아버지와 비교한다.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어야 한다. 아버지와 비교하는 것보다 아무 생각 없이 할 때 야구가 더 잘된다”고 했다.

아버지로서, 또 야구 선배로서 섭섭하진 않을까. 이종범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나와 이치로는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고도 했다.

1995년 한일 프로야구 슈퍼게임을 앞두고 만난 이종범(왼쪽)과 스즈키 이치로. 동아일보DB
1995년 한일 프로야구 슈퍼게임을 앞두고 만난 이종범(왼쪽)과 스즈키 이치로. 동아일보DB
이종범은 이른바 ‘천재형’이다. 야구뿐 아니라 축구, 골프, 당구 등 모든 스포츠와 잡기에 능하다. 1994년 선배 선동열(전 KIA 감독), 가수 양수경과 함께 ‘Two & One’이란 음반을 냈을 정도로 노래 솜씨도 뛰어나다. 남들보다 노력을 덜한 것은 아니지만 놀 땐 놀고, 할 땐 하는 스타일이었다.

이에 비해 이치로는 ‘노력형’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스스로와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수십 년째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머릿속에는 오직 야구밖에 없다. 4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메이저리거로 뛸 수 있는 이유다. 이종범은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존경스럽다”고 했다. 이종범이 이치로에게 부러웠던 것은 또 하나 있다. 바로 왼쪽 타석에 들어서는 것이다. 왼손 타자는 타격과 함께 1루로 내달릴 때 오른손 타자보다 유리하다. 타격 후 홈 플레이트 건너편에서 스타트해야 하는 오른손 타자보다 더 짧은 거리를 달린다. 빠른 발을 가진 이치로는 이 점을 활용해 수백 개의 내야안타를 만들어냈다.

사실 타고난 왼손잡이는 이종범이다. 지금도 야구를 빼곤 모든 걸 왼손으로 한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할 때 왼손잡이용 글러브가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오른손으로 야구를 배웠다. 이에 비해 오른손잡이였던 이치로는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우투좌타(던지는 건 오른손, 치는 건 왼쪽 타석에서 하는 것)로 변신했다. 이종범은 “만약 내가 왼손잡이로 야구를 했다면 훨씬 재미있는 일이 많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정후는 오른손잡이로 태어났다. 그가 야구를 한다고 했을 때 아들을 우투좌타로 바꾼 사람은 이종범이었다. 이종범은 “정후는 이제 몇 경기 했을 뿐이다. 여전히 배울 게 많은 데 벌써부터 너무 큰 주목을 받아 부담스럽다”고 했다.

이정후가 아버지의 벽을 넘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체격 조건과 두둑한 배짱, 그리고 마인드를 보면 불가능해 보이지만도 않는다. 무엇보다 이종범이 인정하고 있다. “정후는 천재형보다는 노력형”이라고.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넥센 이정후#이종범#스즈키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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