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 아래서]〈23〉나비와 닭이 노니는 낙원을 일구리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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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신이현 작가
이윽고 땅을 샀다. 우리는 비로소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땅속에 53도의 뜨거운 물이 흐르는 충주 수안보면 한 모퉁이, 그동안 수없이 이곳을 다녔지만 그때는 남의 땅이었다. 모가 심긴 푸른 들에 바람이 불어 잔물결이 일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나비 제비가 깝쳐도 맨드라미 들마꽃에게 인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봄이 와도 우리에겐 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들의 땅,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띠며 이상화 시인의 시를 노래하며 봄 신령에 잡힌 듯 어깨춤을 추며 걸어간다. 착한 도랑을 따라 난 밭고랑에 앉아 호미질 하는 할머니를 정겹게 보며 말을 붙인다.

“할머니 무엇을 심고 계신 거죠? 아, 양파로군요. 감자도 심을 것이라고요? 이건 언제 먹을 수 있죠? 우리는 저 언덕에 포도나무를 심을 거예요. 땅이 척박하고 빛이 종일 들어오니 포도나무에 꼭 좋은 땅이에요. 맨 먼저 우물부터 팔 거예요. 그래야 갓 심은 나무들에게 물을 흠뻑 줄 수 있으니까요. 나무는 첫 3년 동안 제일 목마르잖아요.”

열일곱 고운 나이에 시집 와서 평생 이곳에서 호미질 하다 보니 온 얼굴에 밭고랑과 같은 주름이 잡힌 할머니는 우리가 아직도 젊다고 생각하신다. 아직 젊으니까 무엇을 해도 된다고, 마을에 젊은이가 와서 좋다고 웃으신다. 우리는 둘 다 중년이지만 이 동네에서는 젊은이가 되어버린다. 이제 우리도 이곳에서 늙어가겠지.

“집을 지을 때는 지붕의 물을 받아 재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돼. 마당엔 물이 고인 작은 웅덩이를 만들 생각이야. 날아가던 새들이 와서 쉬면서 물을 마시고 벌들도 와서 물을 마실 거야.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웅덩이에 두꺼비와 개구리가 살도록 해야 해. 그래야 모기와 날아다니는 잡벌레들을 다 잡아먹을 테니까.”

작은 땅이 생기자 그는 벌과 나비가 윙윙대고 새들이 지저귀는,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으로 만들 꿈으로 부풀었다. 양조장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면 밤이 깊도록 책을 본다. 그동안 양조와 농업에 관해 독파했던 모든 책들을 쌓아놓고 필요한 부분들을 체크한다. 어떻게 하면 작은 땅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지, 어떻게 하면 가장 건강한 땅을 만들지, 어떻게 하면 자연 에너지를 잘 활용한 건축법일지…. 레돔의 머리카락이 언제 저렇게 희끗해졌을까. 그는 청년의 기백으로 공부를 하는데 내 눈에는 자꾸 그의 흰 머리카락이 보인다.

“뭔가 하나를 하면 두 개 이상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가장 좋아. 그러니까 포도밭에 닭을 푼다고 생각해 봐. 첫째는 닭이 잡초를 뜯어 먹지. 둘째는 벌레를 잡아먹지. 셋째는 알을 낳아주지. 넷째는 흙을 쪼아주지. 다섯째는 닭똥이라는 거름을 주지. 여섯째는 고기를 먹게 해주지. 닭이라는 1로 인해 여섯 개의 효과가 나오는 거야. 이 땅에다 무엇인가를 할 때는 항상 그런 효과를 생각하면서 해야 될 거야.”

사람들은 레돔이 말이 없는 남자라고 생각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나올 때는 막을 수가 없다. 닭이 똥을 싸며 꼬꼬댁거리고 개구리와 두꺼비가 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모기를 잡아먹는 풍경을 생각하니 이건 집이 아니고 작은 밀림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바로 그거야. 숲 정원을 만드는 거야. 산에 가면 작은 나무부터 큰 나무까지 하모니를 이루어 잘 자라고 있잖아. 우리 정원도 그렇게 해야 해. 큰 나무들이 있고 그 사이에 중간 크기의 나무, 나무를 타고 오르는 넝쿨 식물들, 맨 아래에는 작은 열매들이 열리는 나무, 바닥에는 딸기 같은 것들, 허브와 같은 한해살이풀과 꽃들을 심는 거지. 그러면 정원도 숲처럼 자연스러운 밸런스를 가지게 되거든.”

그러면서 나의 꿈도 묻는다. 사실 나는 앞으로 해야 할 태산 같은 일이 걱정이다. 거기에 들어갈 돈은 어디서 구할지도 걱정이다. 진짜 내 꿈을 말하자면, 누군가 부지런히 일궈놓은 농장과 와이너리를 구경하며 그 집 술을 얻어 마시며 즐기는 것인데… 다 글렀다. 이제 이 땅은 우리의 땀을 받아먹고 나날이 푸르름이 더해갈 것이다. 그 보답으로는 우리에게 흰 머리카락과 깊은 주름을 돌려줄 것이다. 땅은 그런 것이다.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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