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진의 필적]〈49〉바른 부자 최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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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경주 최부잣집’은 1600년대 초반부터 1900년 중반까지 300년 동안 12대에 걸쳐 부를 누렸다. 마지막 최부자로 꼽히는 최준은 사촌 처남인 박상진이 총사령으로 있는 대한광복회의 재무를 맡았다가 옥고를 치렀다. 안희제와 함께 독립운동의 자금줄인 백산상회를 운영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에게 거액의 자금을 보냈다.

경북 경주시 교동의 최부잣집은 구한말 의병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은신처였다. 최익현, 신돌석, 최시형, 손병희 등 거쳐 간 인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광복 후에는 인재 양성을 위해 남은 전 재산을 영남대의 전신인 ‘청구대’와 ‘대구대’ 설립에 쏟아부었다. 최부잣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지금은 집도 후손들이 아닌 영남대에서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존경받는 부자가 거의 없는 대한민국에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남겼다.

최준의 글씨는 정사각형에 가깝고 마무리 획의 삐침이 강한 데다 모서리에 강한 꺾임이 간간이 보여서 올바르고 의지가 강했음이 분명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최진립에 이어 선생의 독립운동은 최부잣집의 권위를 세웠다. 유연하고 행 간격이 매우 넓어서 곧으면서도 온유하고 남을 배려하는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격조와 품격을 가진 부자였을 것이다. 최부잣집의 가훈에도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내용이 있다. 이런 관대한 성향 덕에 최부잣집이 오랜 시간 부를 유지하고 활빈당의 불길 속에서도 살아남았을 것이다. 글자가 비교적 커서 낭비적 성향도 있지만 통이 크고 용기와 사회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쉬운 점은 글자의 아랫부분이 윗부분보다 많이 작아서 하는 일이 용두사미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구본진 변호사·필적 연구가
#최준#최부잣집#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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