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전쟁史]〈60〉라이플에 함락된 조선 요새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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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때 조정에서 벽돌 논쟁이 벌어졌다. 숙종 때부터 수도 방어를 위해 강화도 요새화 사업이 진행되었는데, 새로 수축하는 성벽을 전통적인 방식인 석재가 아니라 벽돌로 쌓자는 의견이 제기된 것이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벽돌이 건축재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토질상 벽돌 제작이 어려웠다. 당시에 조선이 아는 세계 최고의 선진국은 중국이었으므로 강화 요새화 사업에 중국의 첨단 건축 방식을 도입하자는 취지였다.

설왕설래 끝에 실험을 해 보기로 했다. 석조와 벽돌 성벽에 대포를 쏴서 강도를 테스트했다. 결과는 의외였다. 전통적인 석조 성벽이 더 강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정부는 중국에 기술자를 보내 벽돌 제조법을 배워왔다. 과연 중국의 벽돌 제조법은 달랐다. 신제조법으로 벽돌을 만들어 다시 테스트했다. 놀랍게도 결과는 또 석조의 승리였다. 우리 땅에 가득한 화강암은 모든 석재 중에서도 최고의 강도를 자랑하는 돌이다. 반면 만주에만 가도 거의 석회암을 석재로 사용하는데, 강도에서 화강암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석회암을 벽돌로 대체했고, 우리는 벽돌로 대체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두껍게 석재를 썰어 쌓은 강화의 성벽은 19세기 말 서양의 신식 대포도 충분히 견딜 만큼 강했다. 그러나 신미양요가 벌어지자 광성보는 조선군의 용감한 항전에도 불구하고 미 해병대에 허무하게 함락되고 말았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광성보는 하늘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당시 조선군의 화승총은 50m 이내에서 쏴야 살상력이 있었다. 그래서 이런 입지에서도 수비군에게 유리했다. 하지만 서구 군대는 이미 강선이 들어가 사거리가 200m가 넘는 라이플을 장비하고 있었다. 하늘을 배경으로 몸을 드러낸 조선군의 실루엣은 기가 막히게 좋은 표적이었다. 강화의 요새는 강도는 충분했지만, 신무기와 신무기가 만든 전술과 맞지 않았다. 우리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19세기에 이미 어리석은 행위였다.
 
임용한 역사학자
#벽돌 논쟁#라이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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