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65〉백조의 폭력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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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는 강에서 목욕하는 스파르타 왕비 레다의 나신을 훔쳐보고 음모를 꾸민다. 그는 백조로 변신해 독수리로 변신한 그의 아들 헤르메스에게 쫓기는 상황을 연출한다. 레다는 백조가 안쓰러워 품에 안아준다. 그러자 그는 우악스러운 힘으로 레다의 몸을 유린한다.

최근에 폼페이에서 발견된 프레스코 벽화는 우리를 그 신화 속으로 안내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벽화 속의 백조와 레다는 신화와는 사뭇 다르다. 레다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의 기미가 없다. 백조의 크기가 레다에 비해 현저하게 작은 것도 묘하긴 마찬가지다. 그렇게 작은 몸이 폭력의 주체라니. 주택의 벽화라서 폭력적인 요소들을 최대한 순화시켜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폭력은 폭력인데 개인의 집 벽화로 그리다니, 놀라운 로마제국의 가학적 취향이다.

이 신화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벽화보다는 폭력성을 전면에 부각시킨 W B 예이츠의 소네트 ‘백조와 레다’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급습. 그녀의 비틀거리는 몸 위에서 조용히 파닥이는 거대한 날개”라는 시구가 환기하는 것은 가녀린 몸을 압도하는, “허벅지를 검은 물갈퀴로 쥐고 목덜미를 부리로 잡은” 거대한 몸이다. 예이츠의 시는 그가 소장하던 엘리 포르의 ‘예술사’에 사진으로 실려 있고,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리석 부조, 즉 거대한 백조가 왜소한 여성의 목을 부리로 찍어서 누르는 모습을 거의 그대로 묘사한다.

시인이 그렇게 한 것은 아일랜드 역사를 은유화하기 위해서였다. 레다는 아일랜드였다. 백조가 뿜어내는 “백색의 쇄도”에 무기력하게 늘어진 레다의 몸은 영국의 식민주의 폭력에 노출된 아일랜드에 대한 은유였다. 그는 식민주의에 시달린 조국의 상처를 신화에 빗대 위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의도는 알겠지만 사려 깊은 시도는 아니었다. 단순한 은유에 머물기에는 묘사가 너무 폭력적이어서 그렇다. 과도한 폭력의 재현이 위험한 이유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폼페이#프레스코 벽화#백조와 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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