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44〉김시습의 눈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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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는 상처를 직접 얘기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것을 어딘가에 숨겨 놓고 시치미를 떼기도 한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좋은 예이다. 다섯 편의 단편소설 중 고려시대의 남원을 배경으로 하는 ‘만복사저포기’가 특히 그러하다.

이 소설은 처음에는 인간이 귀신을 사랑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귀신이 나오니 으스스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주인공 양생은 아름다운 여자 귀신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물론 처음에는 그녀를 인간으로 알고 사랑한다. 그러나 그녀가 귀신이라는 것이 드러나도, 그는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그에게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여인이 죽은 경위, 즉 귀신이 되어 떠도는 경위다. 양반집 딸이었던 그녀는 2년 전, 왜적이 침략했을 때 죽었다.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여자가 외세의 침입 때문에 죽었고 급박한 난리 통에 제대로 된 장례식도 없이 매장됐다는 사실이다. 남원 총각 양생이 사랑하는 대상은 그 여자의 귀신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과 귀신의 사랑 이야기라는 외양을 택하면서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만복사저포기’는 외세 침략에 관한 이야기요, 궁극적으로는 그것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금오신화’에 수록된 또 다른 단편소설 ‘이생규장전’에 홍건적의 난 때 죽은 여자 귀신이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하필 여자 귀신일까? 역사에서 이중 삼중의 피해를 당한 것은 거의 언제나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식민주의자들은 땅을 유린하고 그 땅의 여자들을 유린했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식민주의자들이 따르는 일종의 문법이었다.

작가는 스토리의 형식을 빌려, 그 야만적인 문법에 유린당한 여성들의 상처를 간접적으로나마 환기하고 그들을 애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간과 귀신의 사랑 이야기는 실제로는 그 여성들에 대한 애도의 이야기인 셈이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김시습#금오신화#만복사저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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