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37〉폭력을 읽히는 폭력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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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많은 아이들은 매를 맞고 산다. 학교에서도 맞고 집에서도 맞는다. ‘어린이 체벌종식 글로벌 이니셔티브(GIEACPC)’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195개국 중 53개국만이 체벌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체벌을 허용한다. ‘사랑의 매’에 관대한 편인 우리나라는 당연히 후자에 속한다. 그런데 ‘사랑의 매’라는 표현은 모순어법이다. 비폭력인 사랑과 폭력인 매를 한자리에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어이없게도 그 모순이 현실이 되도록 허용하는 것은 국가요 사회요 문화다.

브라질 작가 조제 마우루 지 바스콘셀루스의 자전적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예이다. 이 소설에 대한 우리나라 독자들의 사랑은 유별나다. 우리나라만큼 이 소설에 열광하는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미국에서는 1970년에 번역판이 나오자마자 절판되었다가 2018년에 와서야 새로운 판본이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인기 있는 소설이 그곳에서는 왜 인기가 없을까. 어쩌면 소설의 한복판에 도사리고 있는 무지막지한 폭력과 무관하지 않을지 모른다.

제제는 다섯 살짜리 철부지 소년이다. 그는 누나한테 맞아 이가 부러지고 피범벅이 되고, 아버지한테는 쇠고리가 두 개 달린 허리띠로 맞아 실신하여 일주일 동안 학교에도 못 나간다. 게다가 아버지한테 맞는 대목을 보면, 검은 허리띠를 들고 있는 위협적인 아버지와 실신한 제제의 모습이 ‘친절하게’ 삽화로까지 그려져 있다. 이토록 폭력적인 소설에 열광하고 아이들에게마저 읽히는 가학적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성인들이 읽는 것이야 알아서 할 일이지만, ‘사랑의 매’에서 사랑이 빠지고 매만 남은 가정폭력의 이야기를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버젓이 읽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아이들에 대한 폭력에 무신경하다는 증거다. 매로 때리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다. 폭력을 읽히는 것도 폭력이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사랑의 매#체벌#나의 라임오렌지나무#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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