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 칼럼]한국사회의 권리중독증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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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와 정의 중시하는 나무들… 함께할 때 생존 유리하기 때문
‘권리의 비대칭’ 외면한 채 저마다 제이익만 챙기는 풍토… 사회적 가치 설자리 잃어간다

고미석 논설위원
고미석 논설위원
평일 낮 서울의 강북을 오가는 버스에 타보면 고령화사회를 실감하게 된다. 경동시장을 거쳐 서부 서울의 끝으로 달리는 노선은 주렁주렁 짐 보따리를 양손에 거머쥔 어르신들로 붐빈다. 노약자 좌석에 뒷좌석도 얼추 채워지면 백발 노년의 자리 쟁탈전이 벌어진다. 너도 노인 나도 노인, 양보받을 권리를 공유한 이들 사이에 양보의 미덕은 찾기 힘들다.

한눈에도 몸이 불편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탑승했을 때도 좌석 기득권을 차지한 노인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제일 마음 약한 사람이 일어서기까지 교통약자들의 눈치다툼이 팽팽하다. 그런 걸 지켜보는 시간은 고역이다. 어떤 상황에도 내 몫 빼앗는 일은 용납 못한다는 사회가 도달한 오늘의 각박한 일상이다.

권리와 권리의 충돌이 개인 차원을 넘어서면 상황은 훨씬 복잡해진다. 예컨대, 그제 국회를 통과한 최저임금법 개정안에 민노총 한국노총이 반발하고 있다. 스스로를 약자로 포장하며 기득권을 고수하는 품새가 노인들 자리다툼은 저리 가라다. 양대 노총의 회원은 전체 노동자 1900만 명 중 200만 명에 불과하다. 설령 일부 대목에 불만이 있더라도 제 이익만 고집하는 것은 좋게 보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노동계 출신인 여당 원내대표가 민노총을 향해 “양보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이라고 쓴소리를 했을까.

‘신의 직장’이라는 금융 공기업의 평균 연봉이 억대에 가깝다는 발표 역시 위화감을 주기는 마찬가지다. 법에 어긋난 것도 아닌데 왜 비난받을 일이냐고 내부에서 볼멘소리가 나올 수도 있겠다. 높은 연봉 상승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임직원의 탁월한 실적 덕분인지 아니면 정부 견제가 느슨한 틈에 나눠 가진 과실인지는 자신들이 잘 알 것이다.

가계 소득격차가 사상 최대 수준으로 벌어진 데 이어 빈곤층 가구가 정부 등에서 지원받은 돈이 근로소득을 처음 넘어서는 일이 올해 1분기에 일어났다. 저소득층의 위기상황을 보여주는 신호다. 이런 불평등을 완화하는 노력은 정부 주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모든 구성원이 동참해야 한다. 노조도 빠질 수 없다. 아니 필수요소다. 그런 세상이 되어버렸다. 내 몫에 대한 맹목적 추구가 내가 몸담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성찰이 필요한 시기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햇빛이 절실히 필요한 회사 밖 취약 계층의 존재를 잊는다면?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확보하기는 힘들 터다.

역시 사람보다 나무가 지혜로운 것일까. 독일 산림전문가 페터 볼레벤이 쓴 ‘나무수업―따로 또 같이 살기를 배우다’에 따르면 나무는 공평한 분배와 정의를 중히 여긴다. 가령, 너도밤나무는 뿌리를 통해 허약한 너도밤나무들에게 영양분을 분배해준다. 표 안 나게 땅 밑에서. 운 좋게 햇빛 잘 받는 자리를 차지한 나무는 웃자라고 그렇지 못한 나무는 발육부진으로 뒤처지지 않게끔. 성장 보폭을 서로 맞추는 식으로, 이른바 인간들이 외치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이유를 설명한다. “인간 사회와 똑같다. 함께하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숲에도 약육강식의 논리는 존재한다. 우정도 대개 같은 종끼리 통한다. 그러나 또한 나무는 자신이 전체 숲 공동체와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안다. 모든 개체가 제 앞가림만 할 경우 고목이 될 때까지 생명을 유지할 나무는 몇 안 된다는 사실을. 지나친 욕심에 과속 성장을 추구하며 이웃의 몫을 빼앗으면 자기 생활터전 역시 무너진다는 것도. 힘없는 나무들이 하나둘 사라져 숲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면 거센 폭풍도 찌는 더위도 피할 수 없다. 건강한 나무도 버텨내지 못하고 마침내 숲 전체가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러므로 나무 개체의 건강상태는 숲 생태계의 건강에 달려 있다. 나무가 햇빛에 대한 권리를 누리는 일과 절제하는 것 사이에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이유다. 약의 오남용만큼 권리 오남용이 우려되는 시절. 근시안적 인간을 향해 오월의 나무들이 말하는 듯하다. 우월한 지위에 있을 때도 ‘권리의 비대칭’을 남용하지 않는 것이 자연의 지혜라고.

‘한 나무의 삶은 그것을 둘러싼 숲의 삶만큼만 건강하다’는 말처럼 삼림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도, 어떤 나무의 기쁨이 다른 나무의 고통이 되는 상황은 없어야 함은 상식이다. 숲을 먼저 생각하는 능력, 그것이 나무의 경쟁력이고 인간문명의 척도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고령화사회#권리중독증#소득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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