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 칼럼]버텨낸 것도 성취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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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K팝스타 간절한 소망… ‘그냥 수고했다 고생했다’는 말
힘든 상황 견디면 뭐 달라질까… ‘더 나은 사람 된다’는 새 희망
비에도 바람에도 지지 않고… 지금 이곳에 이른 모든 이에게
2017년, 이대로 충분치 않은가

고미석 논설위원
고미석 논설위원
한번 내뱉은 말, 쏘아버린 화살, 저버린 기회 그리고 흘러간 세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살면서 터득한 ‘돌아오지 않는 것 4가지’라고 한다. 어느덧 세밑. 내세울 것도 없고 손에 쥐는 결과물도 없이 한 해가 갔다는 자책과 아쉬움이 이맘때면 어김없이 밀려온다.

지난주 국내외를 떠들썩하게 만든 케이팝 스타 종현의 극단적 선택을 보면서, 나이 든 사람들 못지않은 젊은 세대의 고민과 좌절의 깊이에 다시 주목한다. 대중의 환호에 익숙했던 그 27세 청춘이 일상에서 간절하게 듣고 싶어 했다는 말은 참으로 소박했다. ‘그냥 수고했다. 이만하면 잘했다. 고생했다.’

젊은 우상의 자살을 계기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20대의 실태도 조명되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의하면 20대 우울증 환자는 2012년 5만2793명에서 2016년 6만4497명으로 22.2%가 늘어, 증가율이 10∼50대 중 가장 높다. 대학 병역 취업 등 변화가 큰 시기라서 인생 초장에 겪는 시련과 절망도 그만큼 깊은가 보다.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성취가 요구되는 시대에 본격적으로 생의 무대를 펼치는 세대여서 더 그런 것인가.

2016년 리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펜싱 선수 박상영의 최근 인터뷰에서 좌절에 빠진 동세대라면 공감할 만한 희망의 빛을 보게 된다. 그는 ‘할 수 있다’는 주문과 함께 극적으로 우승해 국민적 환호를 받았으나 올해 정반대로 깊은 수렁에 빠졌다. 국내대회 1회전 탈락에, 국가대표 선발에 쓴잔을 마셨다. “올림픽 이후 주변에서 많은 사람이 지켜봐주고 칭찬해줬는데 그러면서 나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그는 진단했다.

그렇다면 스스로 내린 처방은? “나를 괴롭히지 말고 편하게 하자고 생각했다.” 그 결과, 자비 출전한 국제대회를 연거푸 석권하며 다시 정상에 섰다. 경기에 졌을 때 상대 실력을 선선히 인정하니 ‘그럴 수도 있다’는 여유가 생기고 더불어 펜싱을 즐기는 마음도 되찾았다는 얘기다.

의젓한 22세의 청년을 보면서 미국의 인기 시트콤 ‘루이’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2011년 카메오로 출연한 유명 코미디언 조앤 리버스에게, 능력보다 버거운 현실의 벽 앞에 매번 좌절하는 주인공이 묻는다. “견디면 상황이 나아지느냐”고. 실제 삶에서도 오르막내리막을 두루 겪은 리버스는 이렇게 답한다. 그렇다면 좋겠으나 그건 모를 일이고, 견딜수록 당신은 더 나은 사람이 된다고. 세대 불문, 곱씹어볼 명답이다.

버틸수록 강해지는 것이 몸의 근육만은 아니다. 힘든 시간을 버티면 궁극적으로 상황이 불변해도 적어도 더 나은 인간은 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희망적 메시지인가. 삶이 아무리 우리를 못살게 굴고 ‘이제 그만 포기하라’는 악마의 속삭임이 달콤하게 들려올 때도 버텨야 할, 그리고 너끈히 버텨낼 수 있는 이유다.

만나본 적 없어도 같은 노래나 영화를 좋아하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에게는 왠지 친밀감이 느껴진다. 얼마 전 신문에서 소설가 김연수 씨가 미야자와 겐지의 시를 자신을 울게 만든 작품으로 꼽았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화 ‘강아지똥’의 작가 권정생이 생전에 존경했던 시인의 글이라는데 국내에는 그의 번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과정을 겪고 있는 스스로를 다독이고 싶을 때 꺼내볼 만하다.

‘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눈보라와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절대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미소 지으며/(…)/동(東)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찾아가서 간호해 주고/서(西)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대신 져 주고/남(南)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북(北)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데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추운 겨울엔 허둥대며 걷고/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고/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움도 끼치지 않는/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특출한 소수를 제외하고 많은 평범한 이들은 그저 하루하루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생을 보낸다. 맑은 날도 있었으나 폭풍우가 몰려온 날과 천둥번개 친 날에 그들은 비에도 바람에도 지지 않으려 이 악물고 버텨냈을 터다.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시련과 역경 앞에 울먹였을 때나,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 썼지만 결국 무릎 꺾였을 때나, 이제 다 지나갔다. 그 모든 날을 견디고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은 얼마나 대단한 성취인가.
 
2017년, 완벽하진 않아도 이대로 충분히 충분했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펜싱 선수 박상영#20대 우울증 환자#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미야자와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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