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원의 옛글에 비추다]군자는 명성을 부끄러워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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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소인은 기뻐하니,
군자는 명성을 부끄럽게 여기고 소인은 명성을 기뻐한다.

君子之所恥 小人之所喜也 君子恥名 小人喜名
군자지소치 소인지소희야 군자치명 소인희명

―배용길, ‘금역당집(琴易堂集)’》

유온수(劉溫수)는 후당(後唐)에서 시작해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를 거쳐 송(宋)나라에 이르기까지 다섯 나라의 조정에서 벼슬을 했는데,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았다. 송나라 태종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의 명성을 듣고 사람을 시켜 많은 돈을 보냈다. 유온수는 감히 왕의 돈을 물리치지 못해 한쪽 방에 넣고 문을 봉인했다. 태종이 다음 해 사람을 통해 좋은 부채를 선물로 보내면서 살펴보니 지난해 돈을 넣은 문이 여전히 봉인된 상태였다. 이 일로 그의 청렴함은 더욱 알려졌고, 후대에도 귀감이 됐다.

그러나 조선 중기의 학자 배용길은 그에 대해 다른 평가를 내렸다. 왕조가 바뀌었는데도 계속 신하 노릇을 해 절의를 지키지 못한 것은 개나 돼지만도 못한 것이라고 혹평했다. 돈을 받고 쓰지 않고 쌓아둔 것만 가지고 예의와 염치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라면 받아야 하고 물리쳐야 할 것이라면 물리치면 그만인데 받아놓고 봉인한 것은 그 마음이 순수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큰 절의를 지키지 못하고 작은 절의만 지키며 세상을 속인 것은 명성을 탐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유온수가 일반적인 평가대로 청렴한 사람이었는지, 배용길의 말처럼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해서 명성을 차지한 사람이었는지, 옛 사람의 마음까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배용길의 문제 제기를 통해 우리는 현재를 한번 깊이 살펴볼 필요는 있다. 이 시대 많은 명망가들의 겉모습에만 현혹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카메라나 남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도 그들의 청렴과 선행이 여전한지, 정작 큰 절의를 바쳐야 할 때에도 지금의 모습과 다름이 없을지….

배용길(裵龍吉·1556∼1609)의 본관은 흥해(興海), 호는 금역당(琴易堂)이다.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감찰 등의 벼슬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에는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기도 했다.
 
이정원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군자#유온수#배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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