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오성윤]불편이 나를 깨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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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윤 잡지 에디터
오성윤 잡지 에디터
필름 카메라를 쓴 지 3년 정도 됐다. 물론 여느 30대처럼 어린 시절에도 부모님의 필름 카메라를 쓴 적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뭘 찍었더라’라고 자문하면 기억은 뿌옇게 흐려질 뿐이다. 3년 전 필름 카메라를 구매하고 촬영하던 감흥은 마냥 생경했으니 후자를 ‘시작’이라 눙쳐도 될 듯싶다.

그때부터 명기(名器)로 회자되는 카메라 열댓 개를 사고팔았다. 필름을 총 120통 정도 현상했고 냉장고에는 필름을 보관하는 칸을 따로 마련했으며, 계절과 날씨를 따지지 않고 늘 카메라와 여분의 필름을 챙겼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카메라를 꺼내는 것은 점점 꺼리게 됐다. 필름 카메라는 으레 편견을 부르는 물건이었으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턴테이블도 없으면서 레코드숍을 헤집고 다니고, 마진 높은 세컨드핸드숍(새 상품이 아닌, 사용했던 옷이나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에서 산 코트를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처럼 걸치고 다닌다면서요?” 하지만 대꾸가 어렵기는 호들갑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늘 필름 카메라를 쓰고 싶었어요. 사진이 너무 예쁘잖아요. 근데 아무래도 불편할 것 같아서 그냥 카메라 앱으로 만족하고 있어요. 보실래요?”

확실히 필름 카메라의 결과물에는 비범한 미감이 있다. 하지만 거기에 디지털 기술로 복제할 수 없는 ‘진본성’이란 게 존재하는가 하면 그건 이견이 있는 명제다. 필름 카메라를 주력으로 사용하는 사진가들조차도 후반 작업으로 둘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다고 호언하곤 하니까. 그들이, 내가, 굳이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이유는 ‘불편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카메라는 간편하고 즉각적이지만 때때로 가슴이 채 뭔가를 느끼기도 전에 손이 먼저 셔터를 누르곤 한다. 조작이 어렵고 확인도 안 되며 사용 횟수도 제한되어 있는 필름 카메라는 사람을 좀 더 면밀하게 만든다. 필름 카메라를 사용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나는 스스로가 무심코 익숙한 풍경들에서도 각별함을 찾아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카메라가 없을 때에도.

지난해 11월 미국 뉴욕타임스에 실린 칼럼 ‘디지털과의 사랑은 끝났다(Our Love Affair With Digital Is Over)’는 최근 몇 년간 바이닐(LP), 필름 카메라, 종이 노트, 보드 게임 등 아날로그 콘텐츠의 판매율이 다시 성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복고 열풍’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세태의 가장 큰 원동력은 일찍이 그것들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세대.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몰랐던 ‘새로운 매체’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지금 이 원고조차 연필과 펜이 아닌 노트북으로 쓰고 있고, 고작 필름 카메라 몇 개 써 본 전력으로 아날로그 예찬론자 행세를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건방지게도 그 칼럼의 끝에 한 문장 사족을 달고 싶어지긴 했다. “그리고 어쩌면 평생을 불편 속에 살아온 윗세대가 문명의 이기를 더 절감하듯, 평생을 편의라는 ‘폭력’ 속에 살아온 아랫세대가 더 선연히 느낄 수 있는 아날로그의 측면이 있을 듯싶다.”

필름 카메라를 꺼내 놓을 때 돌아오는 반응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주로 어떤 걸 찍으세요?” 글쎄. 요즘에는 나무를 촬영하고 있다. 겨울 추위에 잎 하나 남지 않은 나무들을 보면서 자꾸만 이 나무와 저 나무가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면밀함을 곁들여 살다 보면 언젠가 저번 겨울과 이번 겨울이 어떻게 다른지를 아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도 한다.
 
오성윤 잡지 에디터
#필름카메라#세컨드핸드숍#레코드숍#진본성#디지털과의 사랑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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