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최지훈]왜 나를 속이고 살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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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훈 호호스프 대표
최지훈 호호스프 대표
‘관심종자.’ 남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을 속된 말로 이르는 말이다. ‘관종’이라고 줄여서도 부른다. 관심병에 걸려 있다고도 한다. 이젠 흔한 단어가 되어 버렸다.

사람은 관심받기를 원한다. 관심을 주고받는 것이 사회생활이다. 아이들을 보면 그런 특징이 확실히 드러난다. 아이들은 관심받기를 원한다. 아주 노골적이다. 하루를 오로지 관심받기 위해 쓰는 듯하기도 하다. 특히 신생아의 밤낮 없는 오열은 굉장하다. 단순한 관심받기를 넘어 주변을 지치게 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아이들이라고 받기만을 바라진 않는다. 무언가에 관심이 쏠린 아이의 눈을 보면 안다. 우주를 빨아들일 기세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진정성 넘쳐나는 관심을 기울인다. 때 묻지 않은 아이의 관심을 받아보면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관심을 갈구하는 동시에 퍼주는 아이들의 에너지는 대단하다. 그들은 숨김이 없다.

우리 사회는 유독 감정을 숨기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여기게 한다. 그것이 예의라 배웠다. “나대지 마라” “까불지 마라” “화내지 말고, 웃지 말고, 말대꾸하지 말고 참아라” 등등. 외국 동료들이 자주 묻던 얘기가 있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샤이(shy)’한가?” 개인의 생각을 감춘 우리의 모습을 그들은 수줍은 모습으로 여겼다. 아이러니하다. 감정을 감춘 어른스러운 모습이 지구를 돌아가면 아이처럼 수줍은 모습이 된다.

아이는 질투한다. 아이의 질투심은 본능에서 오는 생존 도구다. 관심은 살아남기 위해 쟁취해야 할 필수 조건이다. 나에게 집중될 관심이 분산되면 위태로움을 느낀다. 비단 유아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한 사람을 관심종자로 몰아 고립시키는 모습은 질투심의 발현이다. 아이 같은 질투심이다. 관심받고 싶은 것은 병이 아니다. 그들이 움츠러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모두 활개 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관심종자’ ‘관심병’이란 말이 생겨난 배경도 다르지 않다. 표현의 절제를 추구해온 우리의 특징이다. 상대의 적나라한 희로애락을 받아줄 여유를 잃었다. 획일화가 곧 안정이고 평화라 느낀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배웠으니 당연한 결과다.

유독 감정 표현에 대한 인식이 나쁜 우리. 자아를 당당히 드러내는 것에 대한 사회적 제재가 너무 강하다. 튀는 행동이나 사상은 거대한 군중이 쏟아내는 돌팔매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 간다. 사라진 많은 관심종자 중에 우리의 미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글로벌 시대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다. 관심받고 싶어 하는 사람을 욕하는 대신에 내가 더 관심받기 위해 노력하면 서로 재밌지 않을까? 개인보다 집단에 무게를 두는 민족성이란다. 지금부터 우리가 만들어 나갈 문화도 후대에 민족성이라 불릴 것을 생각하면 과거의 민족성에 집착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제 제발 바뀌었으면 한다.

관심종자를 보면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롱패딩 속에 자신을 숨긴 채 손가락질하거나, 내가 더 관심종자가 되거나. 마음 다치는 이가 적은 건 후자일 것이다. 재미도 있어 보인다. 상처받는 사람 없고 재밌는 세상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튀는 사람을 관심병자로 몰아놓고 대중 속으로 숨어드는 행동은 비겁하다. 솔직한 세상이 좋다. 남 생각 말고 내 삶을 사는 세상. ‘나도 관심받고 싶다’를 각자 크게 외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비난할 이유가 없다. 서로의 관심을 바라고 나눠주는 모습은 매우 자연스럽다. 우리도 ‘샤이’하지 않은 어른이 될 수 있다.
 
최지훈 호호스프 대표
#관심종자#관심병#나도 관심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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