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철주의 ‘삶과 죽음 이야기’]<19·끝>왕진가방 들고 다니는 ‘산타 의사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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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주 칼럼니스트
최철주 칼럼니스트
지금 이 시대에도 왕진가방을 들고 환자 집을 찾아다니는 의사들이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2, 3차례 가정을 방문하는 일정에는 변함이 없다. 환자는 대부분 임종을 몇 개월 앞두고 있다. 의사들은 통증에 시달리거나 변비 욕창 등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다. 복수가 차서 뒹구는 이들에게도 달려간다.

그들의 환자 왕진에는 의료수가가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무료 치료이다. 호스피스 의사로 불리는 이들에게는 돈 생기는 일도 없고 명예가 찾아오는 일도 없다. 이들 왕진 의사 가운데 한 사람은 서울성모병원 완화의료과의 이경식 박사(69)이고 다른 한 사람은 경기 포천시 모현의료센터 진료원장 정극규 박사(62)이다.

쪽방촌 돌며 말기환자 돌봐

종합병원 외과의사로 일하다 캐나다에서 8년 동안 호스피스 공부를 하고 돌아온 정 박사는 귀국 후 인생 진로를 바꾸었다. 화려한 외과의보다는 말기암 환자 곁에서 호스피스 치료를 해주는 의사로 재출발했다. 6년 전 서울 외곽 지역의 조그마한 모현 호스피스 병동을 근무지로 선택했다.

그가 지금까지 봐온 말기환자들은 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시달리다 가족과 제대로 이야기조차 못한 채 떠나가는 모습이 전부였다. 그는 4기 환자나 말기 환자들의 손 한 번 잡아주지 않고 모니터만 쳐다보는 의사들의 진료 행위에 질렸고 “항암제를 또 바꿔 봅시다”라든가 “아프면 응급실로 오세요”라고 무표정하게 던지는 말투가 싫었다. 말기환자가 위급 상태가 되어 응급실을 찾아가도 인간적인 대접을 받기 쉽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안다. 간단한 치료를 받는 데 꼬박 하루 걸리는 응급실의 악몽에서 말기환자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6시간 걸릴 치료 30분만에 끝내


그는 1주일에 사흘은 포천 호스피스 병동에서 진료하고 이틀은 서울 지역 말기환자 집을 방문한다. 종로3가 뒷골목이나 혜화동 산골짜기 쪽방촌을 포함해 중산층 이상이 몰려 있는 주택가도 방문한다. 그는 수녀들과 함께 가정 호스피스 활동을 하면서 환자의 혈관을 찾아내 적절한 수액주사를 놓거나 복수를 빼내 환자의 통증을 덜어준다. 환자가 응급실을 방문해 6시간 정도 걸릴 치료를 30분 안에 끝마친다. 외과 전문의 때 실력이 환자 침실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를 기다리는 환자가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자택이 있는 경기 성남시 판교에서 포천 호스피스 병동으로 출근하는 데 거의 2시간이 걸리지만 운전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새로운 환자의 마지막 삶을 편안하게 마무리해 주는 스케줄을 짠다. 미국처럼 말기환자의 90%가 호스피스라는 시스템에 의해서 삶을 관리하는 방안은 없을까 하고 의료정책의 큰 줄거리를 세우는 공부도 한다.

그가 해마다 직간접으로 임종한 환자는 병원에서 200여 명, 서울지역 가정 호스피스를 통해 임종한 환자는 170여 명이나 된다. 환자들이 통증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늘 머리에 떠올라 왕진을 게을리할 수 없다. 어느 환자 머리맡에 놓여 있는 오래된 개다리소반과 왱왱거리는 파리 떼가 아픔으로 느껴져 그의 발걸음도 빨라진다. 무엇이 그를 산타클로스 의사로 만들었을까. “나는 목적을 가지고 산다. 마지막 떠나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의사로서 그의 활동은 추상적이지 않다. 항상 구체적이다. 환자를 솔직하게 대하라고 자신을 채찍질한다.

또 한 사람의 산타 의사인 이경식 박사에 대해서 여러 사람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의 왕진 활동에 대한 목격담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언제나 과묵한 사람이다. 그런데 환자 옆에만 가면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 하듯 조곤조곤 여러 가지 증상을 설명해 준다.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 자원봉사자들로 이뤄진 이경식 팀은 서울뿐 아니라 남양주 과천 분당 수지 지역 말기환자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의 왕진 가방에는 청진기와 플래시 성서 등이 들어 있다.

그는 한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의 여러 병원에서 13년 동안 혈액종양 내과의사로 활동했다. 귀국해서 의사로서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어느 날부터 매일 죽어가는 암 환자 보기가 싫어졌다. 운명의 해는 1980년대 초였다. 종양전문의인 그가 간판도 없이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8년 후에는 현재의 서울성모병원에 호스피스 병동이 세워졌다. 그의 집념이 낳은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병원 완화의료 시설이었다.

“호스피스는 처음엔 의사 후배들에게도 큰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다른 진료 과목처럼 화려하지가 않아요. 월급 더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의사들이 내 뒤를 이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내 스스로 내 삶의 의미를 찾아야 했습니다. 호스피스 의사가 되는 것은 내 소명이었습니다.”

종합병원에서 다른 과목 의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왕’이라고 불린다. 명성도 따른다. 당연히 의사가 주인이 되고 그 권위에 도전할 사람이 없다. 의사가 한 번 진찰하고 처방하면 다음 절차가 기다린다. 그러나 호스피스 의사는 환자 집을 방문하면서 왕 노릇 할 수가 없다. 간호사 성직자 봉사자들과 같이 움직이며 환자가 편히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협업체제를 갖춰야 한다. 한 개의 팀이 환자를 섬기는 입장이라야 호스피스 치료가 가능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가정집에서 13년 동안 누워 지낸 한 여성 말기환자도 맡았다. 그 오랜 기간에도 욕창이 생기지 않을 만큼 남편의 보살핌이 극진했다. 마침내 식물인간이 된 그 환자가 어느 날 자연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이들 부부가 호스피스 치료를 계기로 ‘승화’했다고 표현했다. 숨진 아내도 그를 간병한 남편도 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스러운 얼굴로 이별한 특별한 경험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빈 마음’이란 게 바로 그런 모습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날 필요로 하면 어디든지 방문”

이 박사는 자신이 왕진하며 환자를 보고 나올 때마다 ‘나는 이대로 죽어도 좋다. 당장 세상을 떠나도 후회가 없다. 그것이 나의 길’이라고 늘 다짐한다. 말기환자들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어디든지 방문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있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내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라고 답변한다. 그는 지난주에 발을 삐끗했다. 그런데도 별일 없다는 듯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을 돌아보고 그의 팀과 함께 서울지역 말기환자 가정 방문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경식 박사 그리고 정극규 박사 두 분에게 축복이 있기를 빈다. 메리 크리스마스.

[채널A 영상] ‘암을 이긴 의사’ 홍영재 “4대 항암음식 챙겨야”
최철주 칼럼니스트 choicj114@yahoo.co.kr
#왕진#쭉방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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