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얻어먹을 때의 처신에 대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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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비판 참여연대 사무처장, 기업 돈으로 해외연수하고 의원 때 남 안 가는 출장 가
피감기관 공짜 의전 다 받고 김영란법 제정에는 앞장
김기식, 금감원장 자격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을 옹호하면서 사용한 ‘실패한 로비’라는 표현은 책에 돈 봉투를 넣어 줬으나 당사자가 그대로 다시 돌려줬을 때나 사용하는 표현이다. 피감기관이나 피감기관도 아닌 민간은행 돈으로 해외 출장을 갔다 와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실패한 로비가 아니라 그냥 얻어먹고 입 닦은 것이다.

얻어먹고 뭔가 해주는 것보다 인간적으로 더 못한 것은 얻어먹고도 입 닦는 것이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여비서까지 데리고 가서 얻어먹었고, 알고 보니 여비서도 아닌 여자 인턴이었다. 얻어먹고 뭔가 해주지도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얻어먹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마음 약한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런 소심함이 일상에서 정의(正義)의 토대가 된다.

실제로는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가서 얻어먹었는데 아무것도 해주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김 원장은 국회의원 시절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돈으로 미국 유럽 출장을 다녀왔다. 당시 KIEP가 요청했던 유럽사무소 예산을 국회 심의에 반영하지 않았다고 해서 김 대변인의 ‘실패한 로비’라는 변명을 불렀으나 나중에 본인 해명으로는 예산심사보고서에 부대의견으로 절충안을 달아 추후 약 3억 원의 예산이 배정되는 길을 연 것으로 드러났다.

김 원장이 야당 간사로서 KIEP 돈으로 해외 출장을 갔을 때 여당 간사였던 김용태 의원은 “당시 KIEP에서 여야 간사를 모시고 출장을 가자고 얘기해 거부했다”며 “우선 피감기관 돈으로 정무위원이 출장을 가는 게 말이 되지 않고 기간도 열흘이나 돼 안 가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런 출장을 김 원장은 비서도 아닌 인턴을 데리고 갔다. KIEP 같은 연구기관은 배정된 예산이 적어서 국회에서 조금이라도 예산이 깎이면 타격이 크다는 약점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얻어먹고 뭔가 해주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고 얻어먹고 입 닦는 것은 인간적으로 못할 일이지만, 얻어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라고 하는 것은 더 나쁘다. 내가 너를 해코지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데 해코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라는 것이다. 이때 약자 쪽에서 해코지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대접을 좋게 의전(儀典)이라고 한다. 김 원장은 의원 시절 피감기관인 한국거래소(KPX) 돈으로 우즈베키스탄 출장을, 정부가 단지 주식을 갖고 있는 민간은행인 우리은행 돈으로 중국과 인도 출장을 다녀왔다. 국회는 감사에 필요한 예산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피감기관이나 민간은행의 예산 집행을 감사하는 데 피감기관이나 민간은행의 돈을 쓰면 그런 감사가 제대로 될 수 없다.

그보다 더 나쁜 게 있다. 자기는 얻어먹고 다니면서 남들은 얻어먹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김 원장은 의원 시절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 통과에 앞장섰으나 KIEP 출장과 우리은행 출장은 김영란법이 통과된 뒤에 이뤄졌다. 자기는 의원이 돼 얻어먹을 대로 다 얻어먹으면서 공무원들은 직무 관련성이 있으면 밥 한 그릇, 커피 한잔 얻어먹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는 남들이 얻어먹고 다니는 데는 누구보다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 원장은 의원 시절 국정감사 당시 한국정책금융공사 직원들이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서 투자 기업에서 출장비를 지원받은 것을 두고 “로비나 접대의 성격이 짙다”고 맹렬히 비난한 바 있다.

김 원장은 참여연대 사무처장 시절 대기업의 지원을 받아 1년간 해외연수를 다녀왔다. 이 대기업이 어디인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평소 누구보다 대기업을 비판해온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대기업 돈을 받아 미국 연수를 다녀왔다는 건 모순적이다.

김 원장이라고 변명할 말이 없지 않을 텐데 너무 깎아내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시민운동가나 의원 중에 이보다 더한 사람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전문성이 뛰어나서 금감원장이 된 것은 아니다. 자질이 있다면 도덕성일 텐데 도덕성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만큼 기대에 못 미치는 데 대한 실망감은 더 크다. 삭제해 버리고 싶은 장차관급 명단에 이름 하나를 더 올릴 수밖에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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