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유근형]이낙연 총리와 공무원 망국론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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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형 정치부 기자
유근형 정치부 기자
“총리님, 공개석상에서 질문을 좀 줄여주시면 안 될까요?” 얼마 전 이낙연 국무총리와 일부 장관의 술자리. 한 장관이 총대를 멨다. 장소를 가리지 않는 질문 공세로 공직사회를 다잡는 이 총리에게 애교 섞인 민원을 던진 것. 장관들로선 부하 직원들이 보는 자리에서 총리의 송곳 질문에 대처하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 총리는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국민을 대신해 하는 질문이다. 궁금한 것은 해야 한다.”

최근 장관들에 대한 이 총리의 ‘잔소리’가 늘고 있다는 후문이다. 질책의 강도는 세지고, 빈도도 잦아졌다. 평소 공개석상에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 총리지만, 공무원들을 질타할 때만큼은 달라진다. 이 총리가 목소리를 높이면 고개를 숙이거나 어깨를 움츠리는 장차관들이 적지 않다. 올해 들어 이 총리가 장관들에게 강조하는 화두는 ‘준비 유전자(DNA)’다. 이 총리는 한 회의에서 “공무원들은 준비 DNA가 없다. 식사 시간이 다가와야 무엇을 먹을지 고민한다. 장도 미리 보고, 조리법도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사건 사고가 발생해야 움직이기 시작하는 공무원들의 관행을 질타한 것이다.

현장보다는 보고서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행태도 이 총리의 단골 지적사항이다. “보고서만 보면 대비가 완벽해 보인다” “정책은 현장에서 반드시 굴절된다” “미약한 정책은 수필이지 정책이 아니다” 등 총리의 관련 어록만 종이 한 장에 이를 정도다. 이렇게 총리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문재인 정부 3년 차의 위기감이 반영됐기 때문인 듯하다. ‘영혼 없는 공무원’이 급격히 늘어나는 시기가 바로 집권 3년 차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이 취임 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고 소득주도성장, 비핵화 등 정부의 핵심 정책들이 단시일에 결과를 내기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공무원들이 서서히 복지부동 모드에 들어갔다는 분석도 있다. 집권 초 ‘코드 맞추기’를 시도하다 최근 “조금만 버티자”는 공무원들도 종종 만나게 된다. 한 장관이 회의석상에서 “전 정부에서 블랙리스트 사건을 경험한 공무원들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고 토로했을 정도다.

총리의 메시지가 고위공무원단을 넘어 일반 공무원 사회로 전파되지 않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행정고시 출신의 한 부처 공무원은 “총리에게 혼이 나는 건 주로 장차관과 1급(실장)인데, 2급(국장) 이하 공무원들은 ‘룰루랄라’ 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여당 안팎에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전체 공무원을 대상으로 집체교육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총리가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일선 공무원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국민의 삶은 나아지기 어렵다. 공무원 망국론을 넘지 않고는 문재인 정부 후반기의 성과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이래저래 이 총리에게 ‘악역’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유근형 정치부 기자 noel@donga.com
#이낙연 총리#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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