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염희진]가업 승계를 주저하는 창업주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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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희진 산업2부 기자
염희진 산업2부 기자
강호갑 중견기업연합회장은 12일 열린 기자간담회가 끝날 무렵 한 투자사 대표로부터 들은 얘기를 전했다. 강 회장은 “중견기업으로 성장해야 할 많은 중소기업이 가업 승계가 어려워 사모펀드 같은 인수자를 찾고 있다더라”며 “이런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기자들이) 조사 한번 해달라”고 부탁했다. 강 회장은 가업 승계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로 현행 최고 50%인 높은 상속세율을 꼽았다. 그는 “주식 양도세까지 내면 도저히 경영권을 유지할 수가 없는 수준”이라고 성토했다.

실제로 국내 1위 종자기술을 보유했던 농우바이오는 2013년 창업주의 갑작스러운 사망 후 창업주가 보유한 지분에 대해 1200억 원 이상의 상속세가 부과됐다. 하지만 장남이던 상속자는 갖고 있는 지분을 팔아도 마련할 수 있는 현금이 300억 원에 불과해 농협경제지주에 기업을 매각했다. 세계 1위 손톱깎이 업체 쓰리세븐, 세계 1위 콘돔 생산업체 유니더스, 밀폐용기 제조업체 락앤락 등이 상속세 부담 등의 이유로 기업을 매각했다.

높은 상속세를 피하기 위한 가업상속공제제도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피상속인 10년 이상 경영’ ‘연평균 매출액 3000억 원 미만’ 등 요건이 까다로워 적용받는 기업은 수십 곳에 불과하다. 경영환경이 급변하는 4차 산업혁명 시기에 10년이나 똑같은 업종을 유지해야 하고, 연 매출액 기준도 높지 않아 대상 기업이 적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가업 승계를 주저하고 있다. ‘2018년 중견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견기업 가운데 84.4%는 “가업 승계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실제 가업을 승계한 기업은 8.2%에 불과했다. 또한 가업 승계의 큰 걸림돌로 상속·증여세 조세 부담(69.5%)에 이어 가업 승계 컨설팅 및 정보 부족, 복잡한 지분 구조 등을 꼽았다. 한 전문가는 “승계는 제2의 창업에 준하는 준비가 필요하지만 국내 기업들은 대부분 승계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승계 노하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가업 승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엇갈린다. 요즘처럼 재벌 일가의 갑질 이슈로 재벌 2세가 범죄자로 비치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일각에서는 능력이 부족한 상속자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게 기업 혁신을 지체한다고 주장한다. 상속은 곧 ‘부의 대물림’이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여전하다. 반면 축적된 기술과 역량이 가업 승계를 통해 후대로 전달된다면 그만큼 튼튼한 양질의 일자리가 많아지니 장수기업을 사회적 자산으로 여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창업주의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중견기업 세 곳 중 하나는 수 년 내에 가업 승계 절차를 앞두고 있다. 현재 매출 3000억 원 이상의 중견기업 가운데 대표가 60세를 넘어선 기업은 300여 곳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지금이야말로 가업 승계와 관련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골든타임이라고 얘기한다. 평생 일군 회사를 상속세 벽에 부딪혀 팔아버리는 기업들이 더 늘어나기 전에 가업 승계를 어렵게 만드는 장벽들을 본격적으로 손볼 시점이 됐다.
 
염희진 산업2부 기자 salthj@donga.com
#중견기업연합회#상속세#가업상속공제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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