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정은]‘늙은’ 美민주당에 조롱 폭탄… 북핵에도 낡은 프레임 걱정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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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해골이 피부를 뚫고 나올 것 같다.”

지난주 미국 민주당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공동 TV연설이 끝난 이후 한 미국인 누리꾼이 올린 한 줄 인상평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국경장벽’ 대국민 연설에 맞대응하는 반박성명 발표 형식으로 카메라 앞에 선 야당 투톱의 대국민 연설 장면이 남긴 인상이 그저 ‘해골(skull)’이었나 보다. 그만큼 답답하고 짜증났다는 뜻으로 보였다.

연설 직후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떠들썩했다. ‘밈(meme)’이라고 부르는 각종 패러디가 쏟아졌다. 눈 밑이 시커먼 프랑켄슈타인은 물론이고 섬뜩한 얼굴의 처키 인형을 얼굴 위에 합성한 사진들도 올라왔다. ‘덤 앤드 더머’ ‘보니 앤드 클라이드’처럼 두 사람이 짝을 이뤄 무모한 행동을 벌이는 영화의 패러디 포스터도 등장했다.

연설 분위기가 다소 기괴했던 건 사실이다. 좁은 연단 앞에 어깨를 딱 붙인 채 정면의 카메라를 향한 두 사람의 표정은 지나치게 딱딱했다. 펠로시 의장이 연설할 때 미동도 없이 카메라를 노려보는 슈머 원내대표의 얼굴은 모니터를 뚫고 나올 기세였다.

9일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과 민주당 지도부의 TV 한판 승부는 최장 셧다운(일시 업무정지) 기록을 코앞에 둔 당시에 초미의 관심사였다. 셧다운 장기화까지 불사하며 불법 이민자들을 막기 위한 국경장벽 건설에 무려 5조7000억 원을 쓰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은 논박할 여지가 컸던 만큼 민주당의 논리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 보니 민주당의 참패다. 트럼프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있는 워싱턴포스트조차 칼럼에서 “트럼프가 이겼고, 슈머와 펠로시는 졌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에 앉아 준비된 원고를 잘 소화하며 국가 지도자의 이미지를 연출한 반면에 ‘척 앤드 낸시’는 왜소하고 고집스러워 보였다는 것.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를 ‘분노 발작(temper tantrum)’으로 몰아붙이고 절차에 대한 불평을 늘어놨을 뿐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우스꽝스러운 패러디를 양산한 이번 연설은 더 근본적으로는 민주당 리더십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하원의장에 재선된 펠로시 의장은 올해 79세, 슈머 원내대표는 69세. 노장이다. 당내 젊은 후계 세력을 키우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책적 사고와 실행 방식 모두 낡고 진부해질 위험을 피하기 어렵다.

양쪽의 TV 연설을 다시 들어보다가 그 주제가 국경장벽이 아닌 대북정책이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궁금해졌다.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은 올해부터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깐깐하게 검증하겠다고 벼르고 있지 않았던가. 지난해 말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의 사임으로 ‘어른들의 축’이 모두 퇴장한 상태에서 의회는 견제와 감시의 마지막 보루로 인식되고 있다.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트럼프 행정부 내에 불안한 움직임이 없지 않다. 벌써부터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 대신 미국 본토 공격 위협을 없애고 미국인의 안전을 앞세우는 ‘핵 동결’ 수준에서 북한과 합의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런 시점에 민주당이 “북한은 믿을 수 없는 협상 상대이고, 대북제재는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진부한 레퍼토리처럼 읊어대기만 한다면. 펠로시의 민주당이 낡은 프레임과 접근법으로 지금의 북핵 문제에 접근하다가 또 다른 희화화의 소재만 제공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 누리꾼들이 킬킬거린 ‘척 앤드 낸시’ 패러디를 보고 마냥 같이 웃을 수만은 없었던 이유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lee@donga.com
#미국 민주당#척 슈머#낸시 펠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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