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정동]‘산업정책’은 금칙어가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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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원인 지목된 산업정책, 20년간 사실상 금칙어로 존재해
한국의 총체적 산업정책은 실종
美‘신산업정책’ 英‘기업가형 국가’… 한국도 범정부 어젠다로 부활시켜야

이정동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이정동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조선업을 비롯해 구조조정의 압력이 산업현장을 덮친 지 오래다. 통상문제가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고, 기술혁신에 따른 구조적 실업이 만성화할 것이라는 지적도 하루 이틀이 아니다. 인공지능(AI) 같은 신기술의 등장, 벤처 붐과 공유경제의 확산, 기술규제의 강화 등 산업 관련 이슈도 매일 쏟아지고 있다. 불행히도 이 치열한 구조조정의 현장과 통상분쟁, 기술규제의 현장, 실업문제와 재정정책을 논하는 중요한 자리에 산업정책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작년 말 정부가 야심 차게 산업정책 방향을 발표했음에도 그렇다. 금융 등 해당 부처가 제각기 자기의 정책안을 내고 실행하고 있을 뿐이다. 산업정책의 가장 큰 역할은 산업발전이라는 일관된 관점에서 여러 정부정책을 조화시키고, 우선순위를 정렬하는 역할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현재 우리나라의 산업정책은 안타깝게도 실종 상태다.

산업정책이 이처럼 힘을 잃게 된 원인은 지난 20년간 ‘산업정책’이라는 단어가 사실상 금칙어였기 때문이다. 범정부 차원의 산업정책 논의가 없었던 것은 차치하고라도 정부출연 연구소에서조차 산업정책을 주제로 한 연구보고서를 발간하지 않은 지 오래됐다. 학계에서도 금칙어였음에 틀림없다. 국내에서 발표된 학술논문을 한꺼번에 검색할 수 있는 웹사이트에서 산업정책을 키워드로 논문을 검색해 보면 2000년 이후는 한 손에 꼽을 만한 수가 검색될 뿐이다. 경제나 정책 분야의 그 많은 전문가가 마치 산업정책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작정한 듯하다. 오죽했으면 작년 말 발표된 ‘새 정부의 산업정책 방향’의 모토가 산업정책의 ‘부활’이었을까.

산업정책이 사실상 금칙어가 된 것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와 선진국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식 산업정책의 부작용을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신랄히 비판했다. 각종 보고서에서 한국이 중남미 국가의 산업정책 실패 사례들과 함께 분류되기에 이르렀다. 그 대안으로 신자유주의적 처방이 쏟아졌다. 정부 개입이 최소화된 것처럼 보이는 선진국의 정책기조가 교과서 모범사례로 제시됐고, 곧 바이블이 됐다. 그때부터 산업정책은 한국 사회에서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상징하는 단어처럼 됐다.

그러나 정부가 존재하는 한 진흥을 하건, 규제를 하건 산업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형식과 내용은 다를지언정 산업정책이 없는 나라는 없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실제로 산업정책을 시행하면서도 애써 외면해 온 모양이 마치 부모를 부모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신세였다.

산업정책을 경원시하던 바로 그 선진국들은 스스로 달라졌다. 원론적으로 산업정책이 옳으니 그르니 하는 논쟁이 무의미했다는 자기반성을 먼저 했다.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산업정책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단계로 진화했다. 유럽연합(EU)에서는 산업육성 전략을 어떻게 선별적으로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미국 학계에서는 신산업정책 논쟁이, 영국에서는 기업가형 국가를 지향하는 산업정책이 타당한지를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이 모든 논의의 공통점은 산업정책이 모든 부처가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하는 국가적 어젠다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우리 정책 담당자와 전문가들이 산업정책이 원론적으로 옳지 않다는 20년 전의 교과서에 갇혀 있는 동안 산업정책의 의미는 한없이 축소되었고, 다른 부처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특정 부처의 업무로 격하됐다. 부활을 야심 차게 외쳤지만, 산업정책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너무 오랫동안 금칙어였기 때문이다.

선택과 집중식으로 자원을 몰아주는 옛날 방식의 산업정책은 당연히 유효성이 다했다. 이제는 한국 산업도 혁신기반으로 나가야 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더 진화된 범정부적인 산업정책이 나와야 한다. 산업과 금융, 법과 규제, 외교와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부처들이 산업정책의 틀 속에서 정책 수단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 선진국일수록 산업정책을 범정부적인 어젠다로 간주해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발표하고 챙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산업정책을 더 당당하고 더 자주 이야기해서 제대로 부활시켜야 한다.
 
이정동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구조조정#산업정책#외환위기#산업정책 부작용#신산업정책#기업가형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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