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김정은의 진정성’이라는 신기루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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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논설위원
이기홍 논설위원
북한이 폐쇄를 약속한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 이외에도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미사일 기지를 최소한 13곳 이상 운용중이라는 최근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보고서에 좌파진영은 미국이 대북 압박용으로 정보를 흘렸다고 비판한다. 대화판을 엎으려는 ‘가짜뉴스 술책’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번 보고서는 CSIS의 조지프 버뮤디즈 연구원이 주도했고, 프로젝트 책임자는 ‘코피작전’에 반대해 올 1월 주한 미국대사 내정이 취소된 빅터 차다. 버뮤디즈 연구원은 인정받는 위성사진 분석 전문가로서 정파적·주관적으로 데이터를 해석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평을 받는다. CSIS는 세계 5대 싱크탱크에 꼽히며, 이념성향은 중도~중도우파로 분류된다.

보고서 내용은 상업위성 사진들을 팔로우업한 것이며 내용은 미 정보당국이 군사위성으로 파악한 것과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트럼프에겐 상당히 불리한 내용이다. 싱가포르 정상회담 합의문에 미사일 관련 내용이 포함된 바 없으므로 북-미 합의가 부정된 것은 아니지만, 트럼프가 그동안 “북 미사일 위협을 내가 제거했다”고 수없이 강조해왔기 때문에 대통령이 과장해서 떠벌렸다는 비판여론이 형성될 소지가 크다. 대북 압박은 트럼프도 원하는 바이지만 국내 정치적으로 허풍쟁이로 몰리지 않는 게 더 우선이다. 때문에 트럼프는 “다 알고 있던 내용”이라고 평가절하하며 북-미 협상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CSIS 보고서는 누구의 공작에 의한 게 아니라 연구결과물이며, 그 근저에는 미국 내에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는 북한의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이 깔려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사실 보고서 내용은 북한의 새로운 미사일 도발이 벌어진 양 난리칠만한 건 아니다. 싱가포르 합의문에 미사일 관련 대목이 없음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미국 민주당과 언론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김정은의 비핵화 진정성을 가늠할 중요한 잣대라고 보기 때문이다. 양국 정상이 적대행위 중지와 비핵화를 약속했을 때, 그 전제는 상대가 위협을 느낄 추가적 도발 행위의 중단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 이후에도 “미사일 능력의 극대화를 위해 노력”(버뮤디즈 연구원의 표현)해왔다는 것은 문서상의 합의를 어긴 것은 아닐지라도 합의의 근본정신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입장을 바꿔 만약 미국이 대화 국면에서도 과거 그랬듯 평양 주석궁 타격 능력을 지닌 스텔스 폭격기 비행 훈련을 비밀리에 지속해왔다고 해도 전혀 새로운 게 아니라고 치부하는 게 맞을까.

미사일 기지 문제는 북한이 핵물질 생산을 계속하고 있다는 미 정보당국의 결론과 더불어 고려해야하며 핵심은 비핵화 진정성에 대한 판단이다. 대통령특보인 문정인 교수 등은 김정은의 비핵화 진정성을 믿어달라고 거듭 호소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 대북 제재 완화를 주창하는 것도 김정은의 진정성에 대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진정성을 판단하려면 세 가지를 살펴봐야 한다. 첫째, 그 근거가 객관적인가다. 그런데 문 특보가 내세우는 근거는 문 대통령이 김정은과의 대화에서 느꼈다는 확신이 거의 전부다.

둘째, 약속 후의 행적인데 북한은 첫 단계인 핵신고부터 거부하고 있다. 북한은 “공격 리스트를 달라는 거냐”며 항변하지만, 사실 미국은 이미 유사시 타격대상이 될 북한 전역의 핵시설에 대한 상세한 리스트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이 신고서 제출을 중시하는 것은 신고내용과 미국이 파악한 것을 비교해 김정은의 진정성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역사적 선례인데, 핵실험을 수차례 해 핵탄두와 운반수단을 다량 보유한 국가가 레짐 체인지 없이 자발적으로 핵을 포기한 경우는 없었다.

따라서 현재로선 김정은의 비핵화 진정성을 확신할 근거는 빈약한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의 진정성을 옹호하는 것은 그래야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외교의 기본은 ‘정치적 리얼리즘’이다. 그것은 정치와 외교는 엄정한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정글이라는 냉철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현실에 바탕하지 않은 채 무조건 믿어버리면 환상이나 신기루가 될 수 있다. 설령 종국엔 실제 오아시스로 판명될지라도 도착할 때까지는 신기루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별자리와 지형을 살피고 검증해야 한다.

외교안보 정책결정 과정에서 일부가 장밋빛 시나리오를 앞세운다 해도 정상적인 시스템이라면 다양한 섹터에서 의견이 개진돼 시뮬레이션 하는 과정에서 걸러질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외교안보팀은 정치적 리얼리즘을 체화한 북핵 전문가의 부재 속에, 대통령이 시간표를 정해 주면 신기루든 아니든 오로지 그곳을 향해 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듯 하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북한#csis#핵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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