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부형권]‘지진 수능’이 던진 숙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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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형권 경제부 차장
부형권 경제부 차장
5남매(3남2녀) 중 넷째인 기자는 1984학번 형(첫째)부터 1995학번 동생(막내)까지 대학입시 현장을 부모와 함께 지켜봤다. 그 기간 시험은 학력고사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으로 바뀌었지만 변하지 않는 한 장면이 있었다. 아들딸이 고사실 안에서 진땀 흘리는 동안, 강추위에 떨며 두 손 모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초중고교 12년의 노력을 실수 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포항 지역 지진으로 2018학년도 수능이 16일에서 23일로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뒤 온 국민이 ‘기도하는 어머니’ 마음일 것이다. ‘여진 피해 없이, 다른 불상사 없이 연기된 수능이 안전하고 공정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문재인 대통령이 “정부의 결정을 흔쾌히 수용하고 동의해 주고, 포항과 그 지역 수험생의 아픔을 함께 감당해 주신” 국민에게 감사의 뜻을 표명했다. 정부의 선의(善意)에 우리 착한 국민들이 화답한 셈이다.

그러나 정부가 이런 착한 장면에 취해 수능의 본질적 구조적 취약성을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능은 60만 명 안팎의 수험생이 전국 고사장에 흩어져 앉아 같은 시험지로 평가받는 구조다. 더군다나 그 기회는 초중고교 학창생활 중 단 1회뿐이다. 지진 같은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시험지 분실이나 도난 같은 인재(人災)에도 속수무책이다. 아주 특별하고 거대한 리스크(위험)를 안고 있는 셈이다.

비슷한 자연재해가 미국 수능인 SAT 전날 일어났으면 어떻게 됐을까. 해당 지역 SAT는 당연히 취소되거나 연기됐을 것이다. 실제 폭설이나 허리케인 때문에 일부 지역 SAT가 연기된 사례는 적지 않다. 그러나 다른 지역 수험생과의 형평성 시비나 시험의 공정성 문제가 한국처럼 제기되지 않는다. SAT는 1년에 7차례 실시되고, 다른 수능 격인 ACT도 SAT와 다른 날짜에 역시 연 7회 진행된다. 수학능력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시험이 연간 14회나 있는 셈이다. 게다가 미국 대학들은 SAT나 ACT 성적을 다양한 평가 자료 중 하나로 활용할 뿐이다. 아이비리그(미 동부 8대 명문 사립대)의 한 교수는 기자에게 “1600점 만점인 SAT에서 만점과 그보다 50점 낮은 1550점 간에 얼마나 유의미한 차이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각 대학의 목적과 사명에 맞는 잠재력과 자질을 갖춘 학생이 우선적으로 선발된다고 했다. 그래서 SAT 만점자의 아이비리그 탈락은 심심찮게 벌어진다.

미국 입시제도가 절대선일 수 없다. 모든 토대가 다른 한국이 그대로 따를 수도 없다. 다만 한국적 특수성이 반영된 수능을 앞으로도 유지할 수밖에 없다면 그 리스크에 대한 대비와 관리가 철저해야 한다.

글로벌 기업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규모의 국내 회사에도 ‘업무연속성계획(BCP·Business Continuity Plan)’이 있다. 테러나 자연재해 같은 비상상황 속에서도 업무가 빠르게 재개될 수 있도록 BCP 모의훈련도 실시한다. 기자가 만난 기업 BCP 관계자들은 이렇게 제언한다.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해당 지역 수험생과 보호자를 인근 안전지대의 공공기관 연수원 같은 곳으로 수송해 시험을 볼 수 있게 하는 비상계획이 촘촘히 마련돼야 할 것 같아요.”

“기존 A시험지가 도난당하거나 유출되면 준비해둔 ‘비상 B시험지’를 각 고사장에 배포할 수 있는 시스템도 필요할 것 같아요.”

연기된 수능이 23일 무사히 진행되길 기도한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리스크 수능에 그만큼 특별한 BCP가 하루라도 빨리 마련되길 기원한다. 이 큰 숙제를 미루지 않는 착한 정부이길 기대한다.

부형권 경제부 차장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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