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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철희]‘8·8 육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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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철희]‘8·8 육치일’

이철희 논설위원 입력 2017-08-10 03:00수정 2017-08-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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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국제정치학계에서 ‘공격적 현실주의’로 유명한 존 미어샤이머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특이한 경력을 가졌다. 웨스트포인트 육사를 졸업하고 공군 장교로 5년간 근무했다(미국에는 교차 임관 제도가 있다). 비록 군 생활은 만족스럽지 못했다지만 군사 문제에 대한 전문적 식견은 그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국가는 단순히 생존이 아닌 패권을 추구하게 마련이라는 그의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론도 군 경력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미어샤이머는 국가의 힘이란 대체로 국가가 보유한 군사력이고, 지금 세계에서 가장 압도적인 형태의 군사력은 단연코 육군이라고 강조한다. 전쟁 승리의 가장 중요한 군사력이 무엇이냐를 둘러싼 오랜 논쟁 과정에서 앨프리드 머핸의 ‘독립해군론’, 줄리오 두에의 ‘전략공군론’도 나왔지만 미어샤이머는 둘 다 틀렸다고 단언한다. 국가의 힘은 공군과 해군의 보조를 받는 육군력에 근거한다는 것이다.(‘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

8일 새 정부 첫 군 수뇌부 인사는 한국 육군엔 또 하나의 ‘육치일(陸恥日·육군 치욕의 날)’로 기록될지 모르겠다. 해군 출신 국방부 장관에 이어 군 서열 1위인 합참의장에 공군 대장이 지명됐다. 여기에 육군 야전사령관 2명은 육사 대신 3사와 학군 출신이 임명됐다. 콧대 높은 육사 출신은 접시 물에 코 박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사실 육사로 대표되는 육군의 추락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전광석화처럼 단행된 하나회 숙군은 그 시작이었다. 대통령 왈 “니들도 많이 놀랐제?” 실제로 청와대 수석들조차 깜짝 놀랐다. 하나회 척결이 없었다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군의 중심은 대구경북(TK)에서 부산경남(PK)으로 넘어갔다. 충청도 출신 공군 대장을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에 기용하기도 했지만 여전한 육군 기세에 맥을 못 췄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은 호남 장교들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억눌린 지역의 한을 푼 것일 뿐이라지만 군의 정치권 줄 대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뒤 이은 노무현 대통령의 육군, 특히 육사 불신은 컸다. 첫 국방부 장관으로 갑종장교 출신을, 두 번째 장관으로 해군 출신을 기용했다. 청와대의 인사 개입은 더욱 노골화했고 육군총장이 항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 들어 육군은 패권을 되찾았다. 해·공군의 득세를 바로잡겠다고 나섰다. 영남 편중도 심해졌다. 육·해·공 3군 총장이 모두 영남 출신으로 채워지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기조는 박근혜 정부로 이어졌다. 세간에서 ‘누나회’로 불린 하나회의 막내 기수이자 대통령 동생의 동기에서 중장 8명, 대장 3명이 나왔다. 바로 며칠 전 전면 퇴장당한 육사 37기다.

잠시 주춤했던 육군의 추락은 이제 다시 시작됐을 뿐이다. 수뇌부에 이은 후속 인사가 이어지면서 수모는 계속될 것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30년간 폭압통치로 군림했다는 원죄(原罪) 딱지에다 태극기 집회에 등장한 육사 마크 깃발로 ‘적폐’ 이미지까지 덧씌워졌다. 이제 ‘닥치고 충성’만 있을 뿐이다.


육군에선 “전임 해·공군 출신 장관·의장 시절을 돌아보라. 앞으로 한국군 꼴이 어떨지 보면 안다”는 얘기가 나온다. 여전히 엘리트 패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고지만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육군 출신 장관이 군 대비태세 같은 합참 업무까지 일일이 챙기며 타군 출신 의장을 ‘보좌’하는 일도 있었다.

한국군 전체 병력의 80%가 넘고 각 군 배분 예산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육군이다. 한국 군사력의 핵심 중추가 언제까지 날개 없는 추락만 계속할 수는 없다. 해·공군 출신 수뇌부가 불안하다면 더욱 잘 뒷받침해서 성공시키는 게 육군의 살길이자 한국군이 사는 길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김영삼#육치일#하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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