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동아/9월 12일]한국 지킨 ‘자유 수호자’ 셀라시에 황제 폐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12일 13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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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 1세. 동아일보DB.
에티오피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 1세. 동아일보DB.

황제는 사실 자기와 별 상관없는 전쟁터에 근위대(황제를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부대)를 보내며 말했다.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 때까지 싸워라. 이기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

이 에티오피아 황제는 자기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타고 다니던 말 이름을 따 이 부대에 ‘칵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칵뉴는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한다”는 뜻.

그 후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에티오피아군 6037명(연인원)이 한국 땅을 밟았다. 이들은 253차례 싸워 253번 모두 승리했다. 한국전쟁기념재단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에티오피아군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다쳤지만, 포로로 잡힌 건 단 한 명도 없었다. 황제가 말한 것처럼 정말 이기거나 죽을 때까지 싸운 것이다.

6·25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군인들. 동아일보DB
6·25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군인들. 동아일보DB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1892~1975)가 6·25전쟁에 군대를 파견한 건 이탈리아에 침략당한 경험 때문이었다. 1936년 이탈리아군이 쳐들어오자 셀라시에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했지만 결국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는 영국으로 망명했고, 1941년 영국군이 이탈리아군을 에티오피아에서 몰아낸 뒤에야 권좌를 되찾을 수 있었다.

6·25 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군인들이 싸워 이기고 돌아간 것만은 아니다. 이들은 월급을 모아 1952년 경기 동두천 시에 ‘보화(Bowha) 고아원(보육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보살폈다.

에티오피아 군인들과 보화 고아원 원생들. 동아일보DB.
에티오피아 군인들과 보화 고아원 원생들. 동아일보DB.

전쟁이 멈추고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다. 에티오피아군은 셀라시에 황제 명령에 따라 휴전 후에도 한반도에 남아 전후 복구를 도왔다. 보화 고아원이 문을 닫은 것도 휴전 후 3년이 지난 1956년이었다.

셀라시에 황제는 1968년 5월 18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 초청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박 대통령은 당시 만찬 인사말을 통해 “폐하는 한국이 공산 침략을 당했을 때 충용(忠勇)스러운 장병들을 보내준 자유의 수호자”라고 평가했다.

셀라시에 황제가 서울에 도착한 소식을 전한 1968년 5월 18일자 동아일보
셀라시에 황제가 서울에 도착한 소식을 전한 1968년 5월 18일자 동아일보

셀라시에 황제는 사흘 뒤 한국을 떠나며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끝내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문제는 그가 에티오피아 황가에서 시조로 삼고 있던 솔로몬 왕처럼 슬기롭게 나라를 다스리지 못했다는 점. 에티오피아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도 황제는 별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민심이 황제를 떠나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80)은 1974년 공산주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해 9월 12일 황제를 폐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 한국에 군대를 파견했지만 자국 내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난 것이다.

셀라시에 황제 폐위 소식을 전한 1974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 1면
셀라시에 황제 폐위 소식을 전한 1974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 1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뒤 에티오피아는 한동안 한국보다 자신들이 맞서 싸웠던 북한과 더 가까운 나라가 되기도 했다. 내전 끝에 1991년 쫓겨 난 멩기스투가 북한에 몸을 숨겼다는 추측이 나올 정도였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꼭 에티오피아에 답방을 가겠다”던 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약속을 지킨 건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 딸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에티오피아를 찾았다. 이에 앞서 이명박 전 대통령도 2011년 에티오피아를 찾았다. 에티오피아를 방문한 한국 정상은 이 전 대통령이 처음이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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