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법의 재발견]<37>사라진 ‘ㅎ’의 흔적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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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미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남미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
언어는 변한다. 재미있는 것은 변화의 흔적이 남아 옛 질서를 보인다는 것이다. 500년 전 발음을 현재 우리말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흔적은 원래의 것은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이와 관련된 맞춤법은 아주 예외적이고 복잡한 것들이 된다는 의미다. 예를 보자.

수컷, 암컷, 수키와, 암키와, 수퇘지, 암퇘지, 수탉, 암탉

모두 올바른 표기다. 이들 표기에 든 ‘ㅎ’을 알 수 있는가?

수ㅎ + 강아지 => ㅎ+ㄱ → ㅋ => 수캉아지
암ㅎ + 병아리 => ㅎ+ㅂ → ㅍ => 암평아리
수ㅎ + 돌쩌귀 => ㅎ+ㄷ → ㅌ => 수톨쩌귀


‘수+강아지’ 가 ‘수캉아지’ 로 소리 나니 ‘ㅎ’이 들어간 것이다. 이것이 옛 언어의 흔적이다. 세종대왕 당시 언어에는 ‘수ㅎ’ 처럼 ‘ㅎ’ 을 가진 단어가 80여 개나 되었다. 오늘날 이 단어들은 더 이상 ‘ㅎ’ 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언어의 변화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단어 속에 ‘ㅎ’의 흔적이 남아 발음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안+밖 => ㅎ+ㅂ → ㅍ => 안팎
머리+가락 => ㅎ+ㄱ → ㅋ => 머리카락
살+고기 => ㅎ+ㄱ → ㅋ => 살코기
암+개 => ㅎ+ㄱ → ㅋ => 암캐


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것은 우리의 발음이다. ‘암+개’를 발음해 보자. 누구도 이 단어를 ‘암개(×)’로 발음하지 않는다. 실제 발음대로 적으면 된다는 의미다. 물론 우리는 ‘ㅎ’에 대한 규칙은 알지 못한다. 어원을 잃었다는 말이다. 맞춤법 원칙은 어원을 잃은 것은 소리 나는 대로 적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 이런 예들을 적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문제는 발음으로 알 수 없는 예들이다. ‘수’가 포함된 단어들을 더 보자.

수개미, 수소, 수사슴, 수거미, 수거위, 수제비, 수송아지, 수늑대, 수벌, 수범, 수할미새

우리 발음으로 ‘ㅎ’이 있는지 없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지금은 ‘ㅎ’이 사라졌으니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아래의 규정을 만든 것이다.

수컷을 이르는 접두사는 ‘수-’로 통일하며, 접두사 ‘수-’ 다음에서 나는 거센소리를 인정한다. 이때의 ‘수-’는 접두사이므로 뒷말과 붙여 쓴다. ―표준어 규정 2장 1절 7항, 한글 맞춤법 1장 2항

발음상 흔적이 분명한 예들은 표기에 반영하고 나머지는 ‘수’만을 적는다는 규정이다. 그러면 아래 예는 뭔가?

숫양, 숫염소, 숫쥐

우리말의 규칙은 하나가 아니다. 이 예들은 다른 규칙인 사이시옷 규칙이 적용된 것을 인정한 표기다. 수 뒤에 ‘ㅅ’ 삽입을 인정한 것은 위 3개가 유일한 예다. 왜 이렇게 복잡할까? 흔적에 대한 규칙은 복잡하고 예외적일 수밖에 없다. 과거 언어의 질서가 사라지면서 남은 아주 예외적인 것들이니까. 이 복잡성들이 언어의 변화 결과로 생기는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하다. 이런 예외는 현재 언어에서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외만큼의 가치로 생각해야 한다.

김남미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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