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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수능장 가는 IMF둥이… 너도 나도 대견하고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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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수능장 가는 IMF둥이… 너도 나도 대견하고 고맙구나

임우선기자 입력 2016-11-17 03:00수정 2016-11-17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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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 딸에게 보내는 엄마의 편지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대학수학능력시험일 아침이다. 올해 수능을 보는 고3은 1998년생 ‘IMF둥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나라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태어난, 팔뚝만 했던 아이들이 어느덧 어엿한 18세 청년이 돼 수험장으로 간다. 그해 당시 한국은 나라가 통째로 망할 것 같은 위기감이 팽배했다. 국가 부도의 고비가 지나간 후 기업들의 도산과 대량 실업 사태가 잇따랐고 거리에는 일자리를 잃은 아버지들이 넘쳐났다. 1998년 1월 1일 당시 동아일보 1면에는 ‘시련을 극복하자’란 제목의 연두제언이 실렸다. 새해 첫날 발표된 연중 주제가 ‘다시 일어서자’였다. 어디를 둘러봐도 불안과 절망만이 가득했던 시절, 가족의 눈물과 고통도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많았다.그런 시기 갓 태어난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한없이 기쁘면서도 또 무거웠다. 이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있을까. 영유아기와 초중고교 12년의 긴 터널을 지나온 아이들과 함께, 이들이 수능을 보기까지 사랑과 희생으로 함께한 부모들 역시 이 시대의 고단한 수험생이었다. 다음은 올해 수험생 강지현(가명) 양의 어머니가 되돌아본 18년의 회상록(回想錄)이다.

 1998년 12월 5일, 온정의 손길을 구하는 구세군 냄비의 종소리가 거리에 가득했던 겨울날 지현이가 태어났다. 단풍잎같이 곱고 예쁜 손, 옥수수 알처럼 작고 동그랗고 보드라웠던 발가락…. 지현이는 그렇게 나에게 왔다.
○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감

 하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기쁨이 컸던 만큼 한숨도 깊었다. 나라는 곧 무너질 듯했고 집안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대학원을 마치고 일자리를 찾지 못해 결혼 후 4년째 비정규직 시간강사로 서울과 지방의 이런저런 학교를 오가며 ‘보따리장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업이 없어 수입도 없었던 방학 때는 학원 강의를 뛰면서 근근이 살았다.

 나는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준공무원 신분이었지만 여자여서 늘 불안했다. 한 공기업에서는 직원들에게 ‘회사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각자 5명씩 적어 내라’는 비인간적인 지시가 내려오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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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우리에게는 지현이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난 언니가 있었다. 아이를 키우며 회사를 다니는 것도 눈치가 보였던 상황에서 계획에 없던 지현이까지 생기자 눈앞이 캄캄했다. 한때 아이를 지울까 고민까지 했다.
○ 가난이 만든 이산가족

 그때는 ‘정말 힘들었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 많이 힘들었다. 나는 경제적으로도 가장 역할을 하며 아이를 키워야 했다. 게다가 칼바람이 부는 공공기관이었던 터라 아침에도 어김없이 제시간에 출근해 일을 해내야 했다.

 서울엔 아이들을 부탁할 가족도, 친척도 없었다. 당연히 아이 둘은 내가 키울 수 없었다. 지현이의 언니는 갓난쟁이 때부터 어린이집에 보냈고, 지현이는 지방에 있는 이모에게 부탁했다. 아이들 생각에 매일 아침 울면서 회사로 뛰었다.

 당시 어린이집은 지금처럼 시설이 좋지도 않았고, 공짜도 아니었다. 좋지도 않은 동네 어린이집에 한 달에 50만 원씩 주고 지현이 언니를 맡겼지만 아이는 매일 아침 어린이집에 갈 때마다 자지러지게 울었다. 다른 어린이집에 보내봐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그만둘 수도,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도 없는 전전긍긍의 연속이었다.

 지방에 두고 온 지현이를 생각해도 애가 닳았다. 하루에도 수천 번 보고 싶었지만 한 번 내려가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자주 보지도 못했다. 엄마 아빠가 가난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핑계로 아이들을 떼어놓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두 돌이 지나고 한국 나이로 네 살이 돼서야 집에 와 같이 살게 된 지현이는 한동안 엄마인 나를 몰라봤다. 밤만 되면 ‘아줌마, 제발 저 좀 보내주세요’라며 우는 아이를 안고 함께 엉엉 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퇴근 후 아이들을 찾아와 씻기고 먹이고 나면 난 저녁밥을 차려 먹을 기운조차 없어 그냥 굶기 일쑤였다.

 그래도 돌아보면 그때가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경제 사정도, 여유 없는 일상도, 모든 게 힘들었지만 지현이까지 작은 집에서 넷이 함께 살게 됐을 때 정말로 행복했다.

 지금은 애들이 다 크고 형편이 조금 나아져 각자 방을 쓰지만 그때는 침대도 없는 방 하나에 이불을 깔고 넷이 누워 잠을 잤다. 찬 바람이 기세 좋게 들어오는 창문에 비닐을 붙여 바람을 막고, 외풍을 이겨 보려 네 식구가 끌어안고 자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힘들었던 기억은 스러져가고 한 방에서 우르르 자던 그 따뜻함만 기억난다.
○ 살 만해지니 아이 짓누르는 사교육

 2005년 남편이 드디어 정규직으로 일할 자리를 찾으면서 집안 형편은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가족끼리 단란한 여행 한 번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애들이 공부로 바빠졌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집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최대한 해주려고 했다. 피아노부터 국영수 학원까지 이런저런 학원을 다니다 보니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시간은 거의 없었다.

 시험은 대체 또 왜 그렇게 자주 있는지. 중간고사 봤다 하면 금방 기말고사가 왔고, 기말고사를 봤다 하면 또 다음 학기 중간고사가 돌아왔다. 방학 때는 학원에서 특강을 들어야 했고, 두 아이의 시험과 학원 일정을 고려하다 보면 가족끼리 2박 3일 여행 갈 시간 한 번 빼기가 정말로 어려웠다.

 우리 때와 달리 입시 걱정은 이미 중학교 때부터 시작됐다. 고등학교 3학년만 입시생인 게 아니라 중학교 1학년 때부터 6년이 입시였다. 학교, 학원, 독서실에서 1년 내내 시험만 준비하는 이 쳇바퀴는 대체 언제 끝나는지 기약조차 없었다.

 두 딸은 모두 이과를 택했다. 내 학창시절 때는 문과생이 훨씬 많았는데 세상이 바뀌었다. 딸들도 성향은 문과가 더 맞았지만 사회적인 추세가 이과였고 공부 좀 한다 하면 이과를 가는 분위기라 반강제로 이과를 갔다.

 내가 다니는 직장에는 강남엄마도 있고, 목동엄마도 있었다. 회사에서 얘기를 듣다 보면 학원은 역시 강남이나 목동 쪽으로 보내는 게 맞다 싶었다. 학교 교육만으로는 아무것도 안 됐다. 아이들은 “선생님은 학원에서 배우고 왔겠지 하고 안 가르친다. 실제로 학원 선생님이 더 잘 가르친다. 학교에선 잠을 자면서 체력 보충을 한다.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안 보내고 싶어도 안 보낼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는 지현이와 언니에게 매달 평균 각각 100만 원이 넘는 학원비가 들어갔다. 방학은 더 무서웠다. ‘윈터스쿨’이다 뭐다 특강이 시작되면 수백만 원이 깨지기도 했다. 아이들이 쉴 곳은 없었다. 매일 밤 학원으로, 독서실로 다니는 아이들이 늘 안쓰러웠다.
○ 이러나저러나 후회뿐인 입시 준비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은 돈대로 썼지만 사실 올해 지현이의 입시 결과는 아직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수시 지원 대학 6곳의 합격자 발표가 전부 난 것은 아니지만 아직 하향 지원한 한 곳에서만 합격 통보가 왔기 때문이다.

 부모의 욕심이 끝없는 것이겠지만 그간의 노력에 비해서는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수능 점수 최저 기준이 있는 학교라 수능에 마음을 놓을 수 없고, 논술시험도 아직 남아있어 여전히 갑갑한 느낌이다.

 어릴 때부터 경제 사정이 좋았다면 지현이가 속상해하지 않을 결과가 나왔을까. 부잣집 애들이 다니던 영어유치원도 보냈다면 아이의 학교생활이 좀 더 편했을까. 일찍부터 좋은 교육을 시키지 못하고 그저 ‘밥만 주는’ 어린이집만 보냈던 게 미안하다. 

 사실 경기 광명으로 이사 올 때 목동으로 갈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집값이 너무 많이 차이가 나서 포기했다. 요즘은 그때 목동으로 갔으면 결과가 달랐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때만 해도 학군, 학군 해도 ‘무슨 학군이냐. 아이만 열심히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광명의 일반고에서는 줄곧 1등이 아니고서는 명문대에 가기가 힘들었다. 광명에 살면서 목동으로 학원을 다니려니 지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무리를 해서라도 갈걸. 나는 그렇게 해줄 수가 없었다. 아이가 속상한 결과를 얻은 건 결국 나 때문이 아닐까.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지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지현이는 재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앞서 언니가 재수를 하며 차 한 대 값에 육박하는 비용을 들이고 온 식구가 고생했지만, 결국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걸 봤기 때문이다. 논술이 남아있지만 논술학원도 안 보낼 것이다. 언니가 논술 준비를 할 때 너무 절박한 마음에 일주일에 100만 원짜리 대치동 학원을 다녔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인(in) 서울’이 이렇게 힘든 건지 정말 몰랐다.
○ 입시 뒤에야 찾아온 인생의 여유

 엄마가 바짝 붙어 있어 줄 수 없고, 좋은 학군에 살지 못하고,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지현이 같은 아이에게 지금의 대입제도는 너무나 힘든 것이다. 내신을 잘 받기 위해 학원을 다니며 너무나 많은 돈을 써야 했고, 선택해야 할 수시의 종류는 너무나 많다.

 이제는 거의 다 끝났지만 대한민국의 평범한 학부모로서 나는 한국의 교육제도가 너무나 불만이고 또 속상하다. ‘정말 열심히 아등바등 살았는데 부족했구나. 아이들과 얼마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는데 시간이 참 빨리 갔구나’ 하는 생각만 든다.

 18년 동안 나를 위해선 뭘 했을까.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그러고 보니 지난 18년 동안 부부 둘이서만 여행을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수능이 끝나면 딸들과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 남은 삶 동안 애들하고 같이 많은 여행을 다니는 게 내 작은 소망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전 그랬던 것처럼, 다시 웃고 이야기하고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지현아, 오늘까지만 힘내라. 그동안 정말 고생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엄마에게 넌 최고의 딸이다. 이젠 우리 같이 웃으며 여행 가자. 사랑한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수능#수험생#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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