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포커스]“혼혈인 1세대의 눈빛 보셨나요?” 이재갑씨

  • 입력 2004년 12월 21일 20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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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직후 태어난 혼혈인 1세대를 14년간 필름에 기록해 온 사진작가 이재갑 씨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이재갑 씨
6·25전쟁 직후 태어난 혼혈인 1세대를 14년간 필름에 기록해 온 사진작가 이재갑 씨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이재갑 씨
《“제 이름은 배기철입니다. 저는 한국인입니다. 단지 피부색이 다를 뿐인데….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르다고 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최근 ‘차별 철폐’를 주제로 내보내고 있는 TV 공익광고. 외국인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한국인’인 혼혈인을 담은 흑백사진이 클로즈업된다. 사진작가 이재갑(李在鉀·38) 씨의 작품이다. 이 씨는 혼혈 1세대의 삶을 기록하는 일에 14년째 매달려 있다.》

1991년 초 군에서 갓 제대한 그는 공연 촬영의뢰를 받고 화려한 무대를 향해 연방 셔터를 눌러대다가 카메라 가방을 찾기 위해 우연히 무대 뒤편에 들렀다. “허름한 무대의 이면, 분장한 채 긴장해 있는 출연자들…. 망치로 제대로 얻어맞은 기분이었죠. 무대 뒤편의 차가운 풍경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어요.”

허름한 게 어디 무대 뒤뿐이랴. 우리 인생, 우리 사회의 이면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이면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 그의 시야에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목표점’이 들어왔다. TV에서 혼혈인 가수 박일준 씨를 접한 것. “박 씨가 ‘어릴 때 우유를 좋아했는데 우유를 많이 마시면 피부가 하얗게 되는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니 방청객들이 박장대소를 하더라고요. 한국사회에서 검은 피부로 살아 온 그에게는 참 가슴 아픈 나날이었을 텐데….”

그 뒤 그는 혼혈 1세대의 존재와 삶을 찾아 나섰다. 한국혼혈인협회의 도움이 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고 그동안 촬영한 혼혈인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5분간 설명하니까 당시 혼혈인협회장이던 가수 윤수일 씨가 ‘그 작업, 같이 합시다’ 그러더라고요.”

그는 윤 씨와 함께 제주도부터 경기도 동두천까지 미군기지가 있는 곳곳을 함께 다니며 ‘혼혈인 실태조사’부터 시작했다. 사회적 소외와 이로 인한 마음의 상처,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 혼혈인들의 마음을 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경제적 처지도 넉넉하지 못했다. 1992년 당시 그는 은행 직원이던 친구가 만들어준 신용카드의 현금서비스 한도액 40만 원이 전 재산이었다. 필름 20만 원어치를 사고 나머지는 여비 삼아 혼혈인들을 찾아다녔다.

“밥을 먹으러 혼혈인과 같이 식당에 들어가면 식당주인이 처음에는 ‘어, 우리말 잘 하네’ 그래요. 그러다 혼혈인이라는 걸 알게 되면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곤 하는 것을 수도 없이 겪었습니다.”

혼혈인들과 함께 한 지 2년여. 혼혈 1세대를 ‘형님’이라고 부를 만큼 서로가 익숙해질 무렵 문득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나’라는 고민이 찾아왔다. 이 일이 ‘남을 위한 자원봉사’인지, 그냥 좋아서 하는 일인지, 생계수단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인천 부평에 사는 혼혈인 L 씨로부터 답을 얻었다. “어느 날 뷰파인더를 통해 형의 눈빛과 마주했는데 그 순간 셔터를 누르지 못했어요. 그 눈빛에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애환, 분노, 억압,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더라고요. ‘형은 그런 것들을 다 수용하면서 살아 왔구나, 같이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구나….’”

마음속으로 ‘형님, 고맙고 미안해요. 역사를 기록하려는 거니까 도와줘요’라고 되뇌었다. 그리고 그게 지금까지 그의 삶이 됐다. 지금 그는 내년 초 출간을 목표로 사진집을 준비하면서 그들과의 14년 인연을 하나하나 되새기고 있다. 200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난 혼혈인 O 씨의 사진이 가장 절실하게 다가왔다. “암 투병 중에 딸을 만나려고 딸이 사는 동네까지 찾아갔다가 결국 못 만나고 이튿날 숨을 거뒀는데…. 그 형 마지막 가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한 게 제 평생 한입니다.”

차별과 소외 속에서 살다가 그렇게 스러져 가는 이들의 흔적…. 2002년 결혼해 지금은 돌을 앞둔 딸의 아빠가 된 그는 새해부터는 혼혈인 2, 3세대들을 찾아보려 한다. 그들의 삶은 1세대보다는 훨씬 희망적인 것이기를 기대하면서.

“혼혈인들이 불쌍하고 가엽다고 생각하면서 사진을 찍은 일은 없습니다.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그들의 삶에 대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내 평생 동안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 이재갑 씨는

△1966년 대구 출생

△1987년 광주대(산업디자인 사진전공) 졸업

△1991년 개인전 ‘무대 뒤의 차가운 풍경’(대구 동아갤러리)

△1997년 개인전 ‘혼혈인-내안의 또 다른 초상’(서울 삼성포토갤러리)

△2000년 개인전 ‘식민지의 잔영’(서울 갤러리 룩스)

△2001년 상명대 대학원 졸업

△2004년 단체초대전 ‘영속하는 순간들-한국과 오키나와, 그 내부에서의 시선들’(미국 뉴욕 현대미술관)

△현재 계명대 광주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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