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하정민]화려한 예술품 속엔 26년 세습통치의 그늘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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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헤이다르알리예프센터. 화려한 외관과 달리 전시물 대부분이 2003년 숨진 알리예프 전 대통령의 유품이어서 아쉬움을 남긴다. 바쿠=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헤이다르알리예프센터. 화려한 외관과 달리 전시물 대부분이 2003년 숨진 알리예프 전 대통령의 유품이어서 아쉬움을 남긴다. 바쿠=하정민 기자 dew@donga.com

하정민 국제부 차장
하정민 국제부 차장
조로아스터교 발상지로 유명한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 카스피해에 면한 수도 바쿠 중심가에 거대한 백색 건물이 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이라크계 영국 건축가 고(故) 자하 하디드의 헤이다르알리예프센터다. 2012년 완공된 이 건물은 형태를 정의하기도 힘든 기상천외한 외관, 역동적이면서도 우아한 곡선 등으로 천재 예술가 하디드의 작품 중 정수(精髓)로 꼽힌다.

3년 전 우연한 계기로 바쿠를 방문했다. 박물관으로 쓰이는 이곳에서 세 번 놀랐다. 너무 아름다워서, 빛나는 겉모양과 달리 내부 전시품의 수준과 질이 떨어져서, 그 대부분이 특정인을 추모하기 위한 용도라서.

박물관은 1993년부터 10년간 집권한 헤이다르 알리예프 전 대통령(1923∼2003)의 이름을 땄다. 현 대통령 일함 알리예프(58)의 부친. 일함은 2003년 10월 대선에서 단독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두 달 뒤 아버지가 숨졌고 아들이 16년째 통치 중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헤이다르 전 대통령이 타던 고급차 3대부터 눈에 띄었다. 그의 일대기를 위인화한 여러 전시물과 동영상, 생전에 쓰던 각종 소품도 있었다. 회화, 조각, 사진들이 일부 전시됐지만 세계적 수준이라 보긴 어려웠다. 박물관이란 외피만 둘렀을 뿐 최고 권력자의 부친을 기리는 ‘사당(祠堂)’에 가깝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부자(父子)의 집권 기간만 26년이지만 알리예프 일가의 통치가 더 이어질 가능성도 높다. 일함의 부인 메리반(55)은 2017년 부통령이 됐다.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나 볼 수 있던 대통령·부통령 부부가 현실에도 등장했다. 이 나라에서 부통령은 대통령 유고 시 대통령을 대신한다. 그 한 해 전에는 헌법 개정으로 기존 35세 이상이었던 대선 출마 연령 제한도 없앴다. 현지 언론은 이 모든 시도가 아직 20대 대학생으로 알려진 부부의 외아들 헤이다르 주니어에게 3대 세습을 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한다.

옆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속속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19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카자흐스탄 대통령(79)이 30년 통치를 마감하고 전격 사퇴했다. 겉으론 “새 시대에 맞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런데 조만간 치러질 대선에서 집권당이 내세울 것이 확실시되는 후보는 상원의원인 그의 장녀 다리가(56)다. 부총리를 지냈고 고령의 부친을 오래 보좌하며 사실상 대통령 노릇을 해 왔다. 선거는 누가 봐도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에모말리 라흐몬 타지키스탄 대통령(67)도 2016년 국민투표로 대선 출마 연령을 35세에서 30세로 낮췄다. 수도 두샨베 시장인 장남 루스탐(32)에게 권력을 물려주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함메도프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62)도 같은 해 대선 출마 연령 제한을 폐지했다. 역시 외아들을 위한 승계 준비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과 그 일가족은 모두 각종 사업체를 운영하며 국가 이권에 깊숙이 개입해 막대한 부도 쌓았다.

1991년 옛 소련 붕괴 후 독립한 이 나라들의 짧은 역사, 석유 등 원자재에 기반한 각종 대중영합주의 정책, 반대파를 철저히 탄압하는 권위주의 통치방식 등 이런 현상이 나타난 원인은 다양하다. 다만 속된 말로 ‘민도(民度)’가 떨어지는 일부 저개발국의 일이라고 무조건 폄훼하면 곤란하다. 이 모든 과정은 국민투표와 일반선거 등 민주주의 절차와 방식을 거쳤다. 총칼을 앞세우거나 노골적인 선거 조작의 부산물은 아니란 뜻이다.

족벌정치의 폐해를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 이를 시도한 정치인과 그 후손의 말로도 그리 좋지 않다.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은 1989년부터 27년간 초대 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1938∼2016)가 통치했다. 그의 장녀 굴나라(47)는 한때 후계자로 거론됐지만 탈세, 범죄조직 연루 등 각종 비리와 안하무인격 태도로 국민의 공분을 샀다. 부친 사망 후 기소돼 현재 가택연금된 처지다. 중앙아시아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조로아스터교 발상지#자하 하디드#헤이다르알리예프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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