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회장, 500원 지폐 ‘거북선’ 보여주며 차관 유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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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한국 기업史 명장면 10]<8·끝> 현대重, 1972년 조선소 착공

1972년 3월 23일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서 현대중공업 임직원과 주한 각국 대사, 울산 시민 등 5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울산조선소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이날 기공식은 우리나라 조선업이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뛰어들었음을 선언하는 상징적인 의식이기도 했다. 현대중공업그룹 제공
1972년 3월 23일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서 현대중공업 임직원과 주한 각국 대사, 울산 시민 등 5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울산조선소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이날 기공식은 우리나라 조선업이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뛰어들었음을 선언하는 상징적인 의식이기도 했다. 현대중공업그룹 제공
“현대가 조선사업에 성공하면 내가 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가겠다.”

1968년 현대중공업이 조선사업을 하겠다고 나서자 한 정부 고위 관료는 이렇게 호언장담했다. 우여곡절 끝에 1971년 7월 조선사업계획서를 완성했지만, 여전히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당시 한국 조선업계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1%에도 못 미쳤다.

조선소 건설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는 외자 확보였다. 현대는 당시 영국 최고의 은행이던 바클레이은행과 4300만 달러(약 510억 원)에 이르는 차관 도입을 협의했다. 하지만 바클레이 측은 현대의 조선 능력과 기술수준이 부족하다며 거절했다. 1971년 9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수소문 끝에 바클레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인 선박 컨설턴트 회사 ‘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을 찾아갔다. 롱바텀 회장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 회장은 재빨리 지갑에서 거북선 그림이 있는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펴보였다.

“우리는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서 있었는데, 산업화가 늦어져서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이오. 한번 시작하면 잠재력이 분출될 것이오.”

롱바텀 회장은 현대건설 등을 직접 둘러본 뒤 추천서를 써서 바클레이에 건넸다. 바클레이가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이번엔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ECGD는 선박을 구매할 사람이 있다는 증명을 갖고 와야 승인하겠다고 통보했다.

즉시 선주를 찾아 나섰지만, 선주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거라곤 울산 미포만의 사진 한 장과 5만 분의 1 지도, 26만 t 유조선 도면 한 장이 전부였다. 우여곡절 끝에 그리스 ‘선 엔터프라이즈’의 리바노스 회장이 값싼 배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계약을 체결했다. 대형 유조선 2척 수주에 성공하며 ECGD의 승인을 받았다.

1972년 3월 23일 오후 2시,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서 정 회장과 주한 각국 대사, 울산 시민 등 5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기공식이 열렸다. 정 회장은 이날 “세계 조선사상 전례가 없는 최단 공기(工期) 내에 최소의 비용으로 최첨단 초대형 조선소와 2척의 유조선을 동시에 건설하겠다”는 사업계획을 밝혔다.

2년여 뒤인 1974년 6월 28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준공식 겸 1, 2호선 명명식이 TV로 생중계됐다. 국내외의 우려를 깨끗이 씻어내고 세계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하는 순간이었다. 현대중공업은 조선소 기공식을 가진 지 11년 만인 1983년, 건조량을 기준으로 조선부문 세계 1위 기업이 됐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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