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진단]가상통화, 끝까지 버티는 2030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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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임수 경제부 차장
정임수 경제부 차장
역시 이번에도 ‘존버’가 답이었다. 존버는 ‘×나게 버티기’의 약자로, 가상통화 투자자들이 많이 쓰는 유행어다. 가상통화 가격이 떨어지더라도 팔지 않고 반등할 때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가상통화 시장은 11일 오전 법무부 장관이 ‘거래소 폐쇄’라는 극약 처방을 덜컥 발표하면서 아수라장이 됐다. 패닉에 빠진 투자자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청와대는 반나절 만에 “확정된 사안이 아니다”며 진화에 나섰다. 결국 정부는 거래소 폐쇄를 장기 과제로 돌리고 당분간 실명제 도입에 주력한다는 방침을 내놨다.

이 과정에서 대표 가상통화인 비트코인 가격은 11일에만 2100만 원에서 1550만 원대로 수직 낙하했다가 다시 2000만 원으로 널뛰기했다. 출렁임을 거듭한 끝에 13일 오후 2100만 원대를 회복했다. 정부의 ‘아니면 말고’ 식의 오락가락 대응이 또 한번 ‘존버하면 된다’는 투자 내성만 키워놓은 꼴이 됐다. 한국에서 거래되는 가상통화가 국제 시세보다 30∼50% 더 비싸 ‘김치 프리미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국내 시장이 이상 과열인 건 분명하다. 눈여겨볼 대목은 투기 광풍을 이끄는 것도, 정부 규제에 가장 격렬하게 반발하는 것도 20, 30대 청년층이라는 점이다.

300만 명을 웃도는 국내 가상통화 투자자의 10명 중 6명이 2030세대다. 사무실, 학교, 지하철에서 온종일 가상통화 시세만 들여다보는 ‘코인 좀비’까지 생겼다. 정부도 현 정권의 지지층인 청년들이 이렇게 반발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이를 두고 기성세대는 “땀 흘려 성취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철없는 요즘 젊은이들”이라고 혀를 찰 수도 있다. 하지만 “비트코인이 인생의 마지막 동아줄”이라는 2030세대의 자조는 쉽게 넘길 일이 아니다.

“가상통화로 대한민국에서 어쩌면 집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대한민국에서 처음 가져본 행복과 꿈을 뺏지 말아 달라”며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온 국민청원에 14일 정오 현재 16만5000여 명이 참여했다. 최근 한 취업 포털에서도 직장인에게 가상통화 투자 이유를 물었더니 약 15%가 “현실 탈출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대답했다.

“현실에서 존버해봤자 88만 원 세대가 78만 원 세대(지난해 저소득 청년층 월소득 78만 원)가 되고 3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포기)에서 포기할 게 너무 많은 N포 세대로 전락하더라. 가상통화 투자로 탈출구를 찾아보자.” 이렇게 생각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반발에는 “부모 세대는 부동산으로 수억 원씩 벌어놓고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뺏으려 하느냐”는 분노가 서려 있다.

역대 모든 정권이 청년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와 기회를 주려 했지만 실패했다. 문재인 정부도 정부 주도로 일자리를 늘려 가계소득을 높이겠다고 하지만 단기간에 이뤄질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덮어놓고 거래소를 폐쇄하는 밀어붙이기식 발상보다는 가상통화 투자로 내몰리는 청년들을 위해 건전한 시장을 만드는 게 먼저다. 불법자금을 솎아내고, 제대로 된 과세 체계를 갖추고, 툭하면 먹통 서버가 되는 거래소를 바로잡는 등 정부가 할 일이 너무도 많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이 고민 끝에 가상통화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인 상황에서 우리만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 베트남처럼 봉쇄 정책을 택한다면 한국을 등지고 해외로 투자처를 옮기는 ‘사이버 망명’만 늘어날 뿐이다. 벌써 한국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세계 최대 거래소인 홍콩 바이낸스에 1주일 새 200만 명이 새로 가입했다고 한다.

정임수 경제부 차장 imsoo@donga.com
#가상통화#정임수#존버#반등#거래소#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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