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와 인민을 향한 맹종과 내핍 명령서 [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5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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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평양에서 열린 북한 최고인민회의(우리의 국회) 14기 1차 회의에 참석한 북한 엘리트들은 국무위원장에 재추대 된 김정은의 시정연설을 듣고 차오르는 한숨을 참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과 국제사회는 김 위원장의 발언 가운데 북미 3차 정상회담 전망이나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요구 정도에 관심을 가졌지만 사실 김 위원장은 연설의 대부분을 엘리트와 주민을 상대로 강력한 내핍과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데 할애했기 때문입니다.

A4용지 16장에 이르는 긴 연설문의 논지는 간단합니다. ‘공화국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가 장기화 될 것 같으니 자력과 자강으로 이겨나가자’는 것입니다. 말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북미정상회담의 결렬이라는 외교적 실패의 책임을 미국과 국제사회에 전가하는 동시에 이에 따른 경제난 극복의 책임을 엘리트와 인민들에게 덮어씌우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이른바 ‘비핵화 협상의 국내정치’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어떤 부분이 엘리트들의 한숨을 자아냈을까요? 우선 김 위원장은 연설 초반에 엘리트들의 특권의식과 부정부패 행위에 대해 일침을 가했습니다.

“인민 위에 군림하여 인민이 부여한 권한을 악용하는 특권행위는 사회주의의 영상과 인민적 성격을 흐리게 하고 당과 국가에 대한 인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약화시켜 사회주의제도의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인민의 이익을 침해하는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부패를 반대하는 투쟁을 국가존망과 관련되는 운명적인 문제로 내세우고 그와의 단호한 전쟁을 선포하였으며 강도 높은 투쟁을 벌이도록 하겠습니다.”

권력을 가진 엘리트들이 인민 위에 군림하지 말라는 말은 정당한 듯 보이지만 부패가 만연된 북한 사회에서 이 말은 ‘누구든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위협에 다름 아닙니다. 마치 과거 한국 권위주의 군사정권하 정풍운동처럼, 지도자에 대해 불만을 품는 세력이 있다면 누구든 부패와 파당형성, 반국가사범으로 몰아 단속하겠다는 말이지요. 실제로 북한 사정당국은 최근 부패한 관료들을 잇달아 처벌하며 부족한 달러를 흡혈하고 있습니다.

일선 공무원들에 대한 군기잡기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각급 인민정권기관(내각과 산하 지방정부) 일군들의 책임성과 역할을 높여야 한다”는 대목에선 이렇게 말합니다.

“일군들은 당에서 밀어주어야만 일자리를 내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사업태도를 결정적으로 뿌리뽑아야 하며 당에서 준 과업은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해내는 강인한 혁명가적 일본새를 지녀야 합니다.”

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권한과 자원이 부족한 내각과 지방정부에 핵개발과 제재로 인한 국가경제 파탄의 책임을 돌리는 전형적인 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 위원장의 위협은 인민들에게도 향합니다. 연설 초반부터 ‘인민생활 제일주의’를 강조하며 민본정치를 홍보하더니 정작 인민들이 당과 국가의 도움 없이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담아야 하는 시장을 통한 자본주의 사상의 확산을 경고합니다.

“사람들의 정신을 침식하고 사회를 변질 타락시키는 온갖 불건전하고 이색적인 현상들의 자그마한 요소에 대해서도 경계심을 가지고 사상교양, 사상투쟁을 강도 높이 벌리며 법적투쟁의 도수를 높여 우리 국가의 사상문화진지를 굳건히 수호하여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회주의 법치국가’라는 개념은 그동안 한국의 역대 정권들이 정권만 잡으면 전가의 보도처럼 들고 나오던 ‘사정한파’를 예고하는 듯합니다. 김 위원장은 “온 사회에 사회주의 준법기풍을 철저히 확립하여 전체 인민이 높은 준법의식을 가지고 국가의 법을 존엄 있게 대하고 자각적으로 의무적으로 준수하도록 하며…”라고 말합니다. 그동안 북한의 위정자들이 법을 자의적이고 편의적으로 사용해 온 것을 의식한 듯 “법집행에서 이중규율을 허용하지 말며 법적용에서 과학성과 객관성, 공정성과 신중성을 철저히 견지함으로써…”라고 덧붙였습니다.

결론 부분에서 김 위원장은 “적대세력들의 제재해제 문제 따위에는 이제 더는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우리의 힘으로 부흥의 앞길을 열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앞선 연설 곳곳에는 제재 장기화에 대한 우려와 두려움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힘으로는 우리를 어쩔 수 없는 세력들에게 있어서 제재는 마지막 궁여일책이라 할지다로 그자체가 우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도전인 만큼 결코 그것을 용납할 수도 방관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국가와 인민의 근본이익’이라고 정의한 핵보유를 포기하지 않으면 제재를 풀 수 없다는 사실, 핵과 미사일, 화학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WMD)의 전면적인 포기를 요구하는 미국에 대항해 다시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 실험을 한다면 더 강한 제재에 직면할 것이라는 현실 인식도 드러납니다. 미국에 ‘계산법을 바꾸라’고 요구하면서도 “올해 말까지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볼 것”이라고 한반 물러섭니다.

마치 시간은 자신들의 편인 양 표현하고 있지만, 글쎄요? 올해 말이 지나고 2020년 새해가 와도 뾰족한 수단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북한의 엘리트들은 내핍과 사정정국에서 살아남을 묘안을 고민하며 앞서 나라를 등진 동료들을 부러워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3차 회담 가능성을 시사하며 김정은 달래기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김 위원장, 시간은 당신 편이 아니야!”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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