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폼페이오 만난뒤 병진노선 변경… 트럼프 요구에 응답?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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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핵실험 중단 선언]

이승헌 정치부장
이승헌 정치부장
김정은이 21일 새벽,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 결정서를 통해 공개한 메시지를 놓고 국제사회가 다시 한번 깜짝 놀라며 진의 파악에 분주하다. 핵심은 과연 김정은이 기만전술이 아니라 진짜로 비핵화에 나서겠느냐는 것이다. 국제사회 누구도 속 시원한 정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의 키를 쥐고 있는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최근 발언 및 반응을 비교 분석해 보면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우선 핵·경제를 동시에 개발하겠다는 ‘병진 노선’. 김정은은 결정서에서 “병진 노선이 위대한 승리로 결속된 것처럼 경제 건설에 총력을 집중하는 새로운 전략적 노선도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며 병진 노선을 접겠다고 밝혔다. 병진 노선은 김정은이 집권 직후인 2013년 3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채택한 방침으로 자신의 시그너처 브랜드다. 미 워싱턴에선 한국어를 그대로 살린 ‘Byungjin policy’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병진 노선=김정은’으로 통해 왔다.

김정은은 올해 초만 해도 병진 노선을 지속하겠다고 했었다. 신년사에서 “(우리의) 위대한 승리는 당의 병진 노선과 과학 중시 사상의 정당성과 생활력의 뚜렷한 증시이며 역사적 장거”라고 일갈한 게 불과 4개월 반 전이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왜 그런 병진 노선을 접고 ‘경제 올인’ 전략으로 선회하겠다고 한 것일까.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경제 제재를 견디지 못해 완성 직전의 핵무력을 포기하겠다고 밝힌 것 같지는 않다. 다시 김정은의 신년사를 보자.

“지난해 우리 당과 국가와 인민이 쟁취한 특출한 성과는 국가 핵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을 성취한 것이다. 마침내 그 어떤 힘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강력하고 믿음직한 전쟁 억제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정치적 수사가 없지 않겠으나 이 말만 보면 김정은은 지난해 한반도를 전쟁 위기까지 몰고 갔던 연쇄 핵·미사일 도발을 통해 이미 충분한 핵능력을 보유했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 때문에 도발은 할 만큼 했고 트럼프를 회담장 앞까지 끌고 왔으니 이제 경제 개발에 진력하겠다는, 이른바 ‘김정은 집권 2기 플랜’을 밝혔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핵무기 선제 이용 및 핵기술 이전 금지를 밝힌 것도 대북 특사단을 평양에서 만났을 때 “대화 진행 시 추가 핵실험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재개는 없다”고 밝힌 만큼 새로운 건 아니다. 핵 선제 이용 금지는 미국 등 핵보유국이 채택하고 있는 ‘No First Use(NFU·도발하지 않으면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독트린과 비슷해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강조하면서 미국과의 군축회담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핵·ICBM 실험 중단,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를 담은 ‘깜짝 선언’의 무게와 의미는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과소평가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트럼프는 김정은 선언 직후 트위터에서 “매우 좋은 소식이다. 북-미 정상회담을 고대한다”라고 썼다. 최근까지 트럼프는 북핵 문제에 대해 긍정 전망을 내놓더라도 “지켜보자(We will see)”는 표현을 잊지 않았다. 17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자(we will see what happens)”고 했다. 거래와 협상이 끝나고 문서에 서명하기 전까지 상대를 믿지 않는 사업가 출신 특유의 감각이 묻어 있는 표현인데, 이번엔 그게 없었다.

이 때문에 워싱턴 조야에선 김정은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후보자를 이달 초 평양에서 만난 직후 이 같은 메시지를 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김정은의 선언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 워싱턴-평양 간 조율을 거치지 않았겠느냐는 것. 특히 트럼프가 트위터에서 “북한이 (내 제안에) 동의해서 핵실험을 멈추었다(North Korea has agreed to suspend all Nuclear Tests)”라고 한 것은 그 단서 중 하나다.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Progress being made for all)”며 북-미 간 협상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렇게 국제사회를 다시 한번 뒤흔든 김정은의 발표는 한국과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에 다층적인 메시지를 주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서는 “비핵화를 해도 내가 한다. 한반도 비핵화 운전석에는 내가 앉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트럼프와 국제사회를 향해서는 비핵화에 나설 테니 ‘정상국가’로 대접하고 경제 개발을 위해 대북제재를 완화해 달라는 ‘청구서’를 내민 것이다. 김정은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밝힌 비핵화를 위한 ‘단계적, 동시적 조치 요구’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백악관도 ‘조건 없는 비핵화’라는 공개적 입장 표명과는 달리 김정은이 실질적인 비핵화에 나선다면 어떤 선물을 줘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김정은이 전혀 엉뚱한 말을 한 건 아니라는 얘기다. 27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의 속내를 파악해 비핵화를 위한 컨베이어 벨트에 앉혀 트럼프에게 넘겨줘야 하는 문 대통령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지고 있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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