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섭의 패션 談談]<4>그림자놀이를 해볼까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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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누구나 어릴 적 그림자놀이의 추억이 있을 겁니다. 창호지 문 앞에서 이리저리 손가락을 움직여 손주들을 위해 이야기보따리를 풀던 할아버지 할머니. 텐트 안에서 랜턴을 벗 삼아 친구들끼리 온갖 동물들을 만들어가며 밤을 지새우던 추억. 이런 기억들로 인해 그림자놀이는 따사롭고 아련하게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패션에도 그림자놀이가 있습니다. 그림자놀이에서는 손가락 조합에 따라 강아지, 비둘기, 도깨비가 나오지만 손마디나 주름 같은 세부적인 부분은 그림자에 묻혀 보이지 않습니다. 패션에서는 절개선을 어떻게 넣고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고 또 어떤 속치마를 입는가 등의 조합에 따라 전체적인 의상의 형태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검게 칠하면 세부적인 것은 보이지 않고 그림자 같은 형상이 나타납니다.

이런 그림자를 ‘실루엣(Silhouette)’이라고 합니다. 의상의 형태에 의한 전체적인 윤곽선을 뜻하며 18세기 프랑스 재무장관 에티엔 드 실루엣(1709∼1767)의 이름에서 유래했지요. 당시 귀족들은 자기 초상화를 제작하는 데 거금이 들자 돈을 절약할 방법으로 검은 종이를 가위로 잘라 옆모습 초상화를 만들었습니다. 프로이센과 영국을 상대로 7년 전쟁(1756∼1763)을 하기 위해 긴축재정을 꾀하던 실루엣 장관은 이런 초상화를 권장했습니다.

패션에서 실루엣의 변천은 유행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실루엣은 다양하게 변했죠. 성적 매력을 발산하기 위해 가슴과 엉덩이 부분은 부풀리고 허리는 한껏 조인 ‘아워글래스(모래시계) 실루엣’, 남성미를 나타내기 위해 어깨를 강조한 ‘역삼각형 실루엣’, 그리고 상체부터 무릎까지 몸에 딱 맞다가 아래로 퍼지는 나팔 모양의 ‘트럼펫 실루엣’ 등 특정 사물의 형태로 실루엣의 이름을 표현했습니다.

현대에 와서, 특히 1950년대를 전후로 디자이너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디자인을 개발하고자 경쟁적으로 새로운 실루엣을 만들었습니다. 일자형인 샤넬의 ‘H 실루엣’, 복고적인 여성미를 표현한 디오르의 ‘X 실루엣’, 상체미를 표현한 발렌시아가의 ‘Y 실루엣’ 등 이 시기에는 주로 알파벳에서 고안한 실루엣을 선보였습니다.

얼마 전 파리 출장에서 재미있는 공연 포스터를 봤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여러 인물을 패러디해 선보이는 공연이었는데, 인물들을 모두 실루엣화해서 검은 윤곽선으로만 표현했더군요.

근데 모든 인물을 다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폭탄 맞은 헤어스타일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민머리에 시가를 문 윈스턴 처칠, 곱슬거리는 짧은 웨이브 머리와 함께 입가의 점을 흰색으로 표현한 메릴린 먼로 등 개성 있는 실루엣이 잡다한 요소들을 없애 훨씬 알아보기 쉬웠습니다.

오늘 나 자신을 까맣게 칠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내 실루엣을 주변 사람들이 알아볼까요? 내면의 복잡한 생각, 복잡한 관계들을 잠시 내려놓고 나를 찾아봅시다. 패션이라는 도구를 통해 나의 개성을 찾는 그림자놀이는 꽤 흥미롭습니다.
 
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패션#실루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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