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매거진]‘나만의 트렁크’와 특별한 여행을 떠나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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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

1907년 베이징-파리 간 경주에서 2위를 차지한 스피케르 14/18HP 투어러. 차체 옆에 루이 비통 트렁크가 달려 있다.
1907년 베이징-파리 간 경주에서 2위를 차지한 스피케르 14/18HP 투어러. 차체 옆에 루이 비통 트렁크가 달려 있다.
자동차의 쓰임새는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 출퇴근이나 쇼핑과 같은 일상 속 이동수단의 역할을 뺀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으로 여행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가나 취미를 즐기기 위해 어딘가로 떠날 때 쉽고 편리하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재규어 F-타입 컨버터블의 적재 공간에 맞춰 모이나가 제작한 맞춤 트렁크.
재규어 F-타입 컨버터블의 적재 공간에 맞춰 모이나가 제작한 맞춤 트렁크.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여행의 동반자로서 자동차의 역할은 빼놓을 수 없다. 물론 가벼운 당일치기 여행이 아니라면 필요한 짐을 챙겨 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엇을 하기 위해 어느 곳에 가서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꾸리는 짐은 달라지기 마련이고, 싣는 짐의 성격에 따라 가방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즉 여행을 떠나는 차에 실린 가방을 보면 차에 탄 사람의 생활과 여행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셈이다.

길 떠나기 전, 차 트렁크를 열고 가방을 싣는 것은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언뜻 특별할 것 없는 이 행동은 한 세기 전만 해도 다른 의미가 있었고 그 모습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전국 어디나 고속도로를 통해 대부분 하루면 원하는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땅이 넓은 여러 나라가 큰 대륙에 모여 있는 유럽 같은 곳에서는 자동차로 떠나는 여행에 며칠씩 걸리기도 한다.

특히 자동차 태동기에는 도로망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자동차의 성능도 지금보다 훨씬 떨어져,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여행 풍속도 마차 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아 사람을 태우기 급급했던 초기 자동차는 따로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마차 시절과 마찬가지로 차 뒤쪽이나 지붕 위, 때로는 차체 옆쪽에 따로 가방을 달아서 필요한 것들을 담아야 했다.

롤스로이스 레이스를 위한 러기지 컬렉션. 차와 브랜드 이미지를 반영하기 위해 자동차 디자이너가 디자인했다.
롤스로이스 레이스를 위한 러기지 컬렉션. 차와 브랜드 이미지를 반영하기 위해 자동차 디자이너가 디자인했다.
일반적인 승용차보다 공간 여유가 더 적은 스포츠카는 짐 싣는 공간이 더 절실했다. 2016년 영국 메드카프 컬렉션(Medcalf Collection)에 매물로 나온 1931년형 8L 벤틀리를 보면 당시 여행을 떠나는 스포츠카의 모습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원래 모습에 가까운 상태로 보존된 벤틀리에는 맞춤 제작된 루이비통 가방 두 개도 포함되어 있다. 차체 뒤쪽에 가방을 놓을 수 있는 선반을 달고, 그 위에 알맞은 크기의 가방을 올려 고정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적재공간으로서의 트렁크는 차체의 일부가 되고, 짐을 싣는 가방으로서의 트렁크는 차에 싣고 내리기 편리한 형태로 바뀌면서 이런 모습은 차츰 드물어졌다. 그러나 안전 문제로 차 외부에 물건을 노출시킬 수 없게 된 지금도 자동차 역사가 긴 곳에서는 클래식 스포츠카의 옛 멋을 표현하는 아이템으로 종종 쓰이곤 한다.

한편 자동차를 주로 이용했던 부유층이나 권력층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이 여행지에서도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여행지에서도 격식을 갖춘 옷과 생활용품이 필요했고, 그런 짐을 깔끔하게 싣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가방과 수납공간이 필요했다. 트렁크(trunk) 또는 러기지(luggage)라고 불린 그런 가방들은 차 외부에 노출된 채로 험한 길의 먼지와 진동, 날씨 변화에 견뎌야 했다. 겉은 외부 충격에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하고 안에 담긴 물건이 손상되거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부드러우면서 꼼꼼하게 마무리해야 했다. 그래서 자동차용 트렁크를 잘 만드는 공방은 자연스럽게 제품의 품질과 내구성을 인정받게 됐다.

페라리 FF의 적재 공간에 맞춰 제작된 가방들.
페라리 FF의 적재 공간에 맞춰 제작된 가방들.
코치빌더를 통해 자동차 차체를 맞춤 제작한 경우에는 트렁크도 곡면이나 곡선 등 차체 외부 형태와 잘 어우러지도록 주문해 다는 일이 흔했다. 그래서 자동차를 위한 맞춤 제작 트렁크는 품격과 장인정신을 보여주는 럭셔리 아이템 중 하나가 되었다. 가방으로 유명한 명품 브랜드 중에 20세기 이전에 창업한 곳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자동차용 트렁크 제작으로 명성을 얻은 곳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31년형 8L 벤틀리에 달린 루이비통 트렁크. 적재 공간이 없던 옛 스포츠카에는 거의 필수 아이템이었다.
1931년형 8L 벤틀리에 달린 루이비통 트렁크. 적재 공간이 없던 옛 스포츠카에는 거의 필수 아이템이었다.
대표적인 브랜드로 루이비통을 빼놓을 수 없다. 1897년에 처음으로 자동차용 트렁크를 만든 루이비통은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자동차에 알맞은 다양한 용도와 크기의 제품을 선보였고 20세기 초반에 있었던 여러 모험과 도전, 여행에 쓰인 자동차와 함께했다.

1907년에 있었던 베이징∼파리 자동차 경주에 출전해 2위를 차지한 스피케르(Spyker) 14/18HP 투어러에는 차를 위해 맞춤 제작한 루이비통 트렁크가 실려 있었다. 당시 제대로 닦인 도로도 없던 곳을 1만 km 남짓 달리는 경주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리에 필요한 공구와 부품을 비롯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데 트렁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0년 이후 네덜란드에서 소량 생산 스포츠카 브랜드로 부활한 스피케르는 지금도 차를 구매할 때 전용 공구 세트를 포함해 맞춤 제작한 루이비통 트렁크 세트를 함께 주문할 수 있다.

1849년 설립한 모이나 역시 20세기 들어 자동차용 트렁크를 만들면서 맞춤 제작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특히 모이나는 트렁크를 받쳐주는 금속 받침대 없이도 차체에 달 수 있도록 독특한 곡면을 갖춘 제품을 만들어 1902년에 특허를 받았다. 리무진 트렁크(Limousine Trunk)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이 제품은 독특한 곡선에서 영감을 얻은 리무진 백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전통이 배경이 돼 모이나는 2014년에 영국 런던에 새로 부티크 문을 열면서 자동차 브랜드 재규어와 협업해 2인승 스포츠카인 F-타입 컨버터블을 위한 맞춤 트렁크를 만들었다. 모이나 트렁크는 컨버터블의 제한된 적재 공간 크기와 형태에 딱 들어맞도록 단 하나만 맞춤 제작한다. 여덟 겹으로 이루어진 나무판으로 형태를 잡은 뒤 짙은 회색 가죽을 입히고 안쪽은 모이나를 상징하는 만다린 오렌지 색 마감재로 감쌌다. 이 맞춤 트렁크는 접이식 전동 킥보드를 넣는 용도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동차가 라이프스타일의 일부로 여겨지는 요즘에는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가 직접 트렁크와 가방을 브랜드 제품화하는 것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롤스로이스는 2016년에 2도어 쿠페인 레이스에 맞춰 롤스로이스 비스포크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직접 디자인한 ‘러기지 컬렉션’을 선보였다. 크고 작은 여섯 개의 가방으로 이루어진 러기지 컬렉션은 레이스의 디자인과 브랜드 이미지를 반영한 것은 물론, 항공기용 알루미늄 합금을 비롯해 차에서 영감을 얻은 첨단 소재와 기술을 전통적인 제작방식에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개별 아이템으로도 살 수 있는 컬렉션 전체의 값은 당시 기준으로 약 2만4000파운드(약 3600만 원)로, 레이스 기본 모델 가격의 7분의 1 남짓이었다.

럭셔리 자동차 맞춤 트렁크의 화려함은 취미활동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하는 데 주로 쓰이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에서 가장 돋보인다. 벤틀리는 첫 SUV인 벤테이가를 위한 다양한 맞춤 트렁크를 내놓고 있다. 2016년에 선보인 벤테이가 플라이 피싱 바이 뮬리너(Bentayga Fly Fishing by Mulliner)는 낚시 애호가를 위한 아이템이다. 네 개의 낚싯대를 포함해 최고급 플라이 낚시 도구와 식기가 고급 가죽과 목재로 만든 케이스에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이처럼 차와 라이프스타일을 가장 잘 반영하는 트렁크를 선택사항처럼 고를 수 있게 되면서 소비자는 브랜드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자동차 브랜드는 수익성을 높일 수 있게 됐다. 쓰는 사람의 라이프스타일과 그 배경이 되는 문화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에 소비자의 만족을 중요시하는 럭셔리 브랜드일수록 제품 개발과 디자인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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