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당했다” 외치고 싶어도…‘미투’에 동참하지 못하는 피해 남성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4일 01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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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 A 씨는 몇 년 전 여성 음악감독 B 씨에게 상습적으로 성추행을 당했다. 대학 때부터 줄곧 배우의 꿈을 키우던 그가 B 씨를 만난 건 한 공연 오디션 장이었다. B 씨는 A 씨의 합격을 약속하며 자신이 연출을 맡은 공연에서 비중 있는 배역을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연을 앞두고 연습에 돌입하면서 B 씨는 돌변했다. “작품 이야기를 해야 하니 집으로 오라” “연습실로 나와 따로 연습하자”며 사적인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철저히 자신을 감췄지만 둘만 있는 곳에서 B 씨는 A 씨의 몸을 더듬었다. 작품 출연의 기회 앞에서 A 씨는 거부하지 못했다. 대신 주변 동료들에게 피해를 하소연했다. 그때마다 돌아온 반응은 대부분 “잘리기 싫으면 버티라”였다.

A 씨는 “여성들과 다를 바 없이 나 또한 늘 성추행에 노출돼 있었다. 하지만 남자라는 이유로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피해사례를 호소해야 하는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밝혔다.

미투가 이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남성들의 목소리는 터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올 1월 29일 서지현 검사(45)의 미투 이후 사회 곳곳에서 용기를 낸 폭로가 나왔지만 남성이 공개적으로 밝힌 성폭력 피해는 동성인 남성에게 당했다는 경우가 전부였다. 하지만 동아일보 기자들이 만난 피해 남성들은 “우리가 당한 성폭력 피해도 적지 않다”고 호소했다.

회사원 C 씨는 “이제는 회식자리가 두렵다”고 말했다. 여성 상사가 항상 자신을 옆자리에 앉힌 뒤 “몸이 탄탄하다”며 허벅지를 더듬거나 가슴팍을 만지는 등 성추행을 일삼기 때문이다. 2차로 노래방이라도 가는 날엔 상사는 어김없이 “블루스를 추자”는 말과 함께 C 씨의 품에 안겼다. 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도록 하기도 했다. C 씨가 머뭇거리거나 싫은 기색을 낼 때면 상사는 “내가 부담스럽게 했냐”며 도리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마다 주변 동료들은 웃을 뿐이었다. C 씨는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예비 신부에게 죄책감이 든다. 결혼하면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남성들은 여성들로부터 입은 성폭력 피해를 주로 가까운 지인에게 호소했다. 사내 성폭력 피해 상담 기구를 이용하거나 공론화 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주변에 내 편은 없다’는 인식 탓이다. 여성들의 미투는 같은 피해 경험을 공유하는 여성들의 지지 속에서 힘을 얻지만 남성들은 같은 집단인 남성들에게서조차 위로받지 못한다. B 씨로부터 상습 성추행을 당했다는 또 다른 배우도 “B 씨를 따로 만나야 하는 나를 두고 주위에서 ‘간택(簡擇) 받은 자’였다”고 말했다.

왜곡된 인식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그동안 사회 내 자리 잡은 남성성을 강요하는 문화가 있다. 신체조건 등 물리적 힘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남성들의 호소를 다른 남성이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허지원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남성들이 피해를 호소해도 ‘오죽 못났으면 남자가 여자한테 당하냐’와 같은 인식을 갖는 경우가 많다. 남성들은 성폭력 피해와 주변의 시선에서 이중적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고 지적했다.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편향된 인식도 남성들의 미투를 가로막는 하나의 원인이다. 미투를 권력 속에서 발생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전반적인 운동이 아니라 여성의 전유물로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그 사이 남성들의 미투가 ‘반(反) 미투’ ‘미투 동력을 떨어뜨리기 위한 공작’으로 폄하된다. 김혜숙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미투 운동이 건전하게 확산되기 위해서는 권력형 성범죄를 근절하고자 했던 그 출발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김동혁 기자 hack@donga.com
안보겸 기자 ab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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