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술탄’ 꿈꾸는 터키, 트럼프 관세 폭탄에 몰락 위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17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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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브로맨스’를 자랑할 만큼 친분을 과시했다. 지난해 4월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이 장기 독재의 길을 여는 개헌을 강행해 국제사회의 눈총을 받을 때도 트럼프 대통령은 축하전화를 걸었다. 앞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미 대선 직후인 2016년 11월 미국내에서 반(反)트럼프 시위가 일어나자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것”이라며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나타냈다.

트럼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브로맨스가 냉랭한 관계로 돌아선 것처럼 트럼프와 에르도안의 관계도 급반전하고 있다.

터키가 구금한 미국인 목사 앤드루 브런슨를 석방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터키가 거부한 것이 뇌관이 되어 트럼프의 관세 폭탄과 터키의 맞불 관세가 난무하는 상황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10일자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미국이 터키에 대한 무례한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동맹을 찾기 시작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세라 허커비 샌더스 미국 백악관 대변인도 16일 “터키가 브런슨 목사를 석방한다 해도 터키산 철강·알루미늄에 대한 관세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며 공세 수위를 높였다.

‘21세기 술탄’을 꿈꾸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중동을 넘어 세계 정치 역학구도의 주요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 서방과 중동, 러시아 사이에 놓인 터키

터키는 1949년 결성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신청했으나 ‘아시아 국가’라는 이유 등으로 거절당하다 6·25 전쟁에 참전해 피를 흘리며 싸워 1952년 2월 전쟁 중 가입됐다. 나토 회원국이 되어 군사 안보 면에서는 서방과 동맹국이 됐지만 이슬람 국가로서 아직도 유럽연합(EU)에는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서쪽과 중동 러시아 사이에 있는 지정학적 특성 만큼이나 터키가 처한 복합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미 공영라디오 NPR은 최근 터키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터키는 지정학적으로나 전략적으로 미국에 중요할 수밖에 없는 국가”라고 전했다. 미국으로서는 터키가 러시아의 팽창주의를 막아주는 핵심 완충국이다. 터키는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수니파 이슬람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 퇴치에도 큰 역할을 했다.

유럽 국가들도 중동으로의 전초 기지인 터키를 우군으로 삼아야 했다. 시리아 난민의 유럽 유입을 막고 테러리스트를 추적하려면 터키의 협력이 절실하다.

● ‘스트롱맨’ 에르도안 변수

에르도안 대통령이 집권을 강화하면서 서방과 터키의 전통적인 협력 체제에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에르도안은 거리에서 레몬에이드와 참깨빵을 팔아 학교에 다닌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총리로 10년 동안 지낼 때는 터키의 국내총생산(GDP)을 3배 가까이 키워 제 2의 국부로 추앙 받았다.

하지만 2016년 7월 군부의 쿠데타 시도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최장 2034년까지 집권할 수 있는 개헌을 밀어붙인 데 이어 자신에게 반대했던 군인, 정치인, 언론인 등을 대거 숙청하며 폭군으로 변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추구하는 EU으로서는 불편한 이웃국가의 지도자가 되어 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초기에는 에르도안이 독재자로 변해가는 것에 개의치 않고 밀월을 유지했지만 점차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올 초 시리아 내전에서 터키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쿠르드 민병대를 테러조직으로 간주해 공격해 미국과 갈등이 불거졌다. 이어 에르도안이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전략적 줄타기’를 하고 있는 정황도 포착돼 미국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터키 정부가 지난달 ‘러시아판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로 불리는 지대공 미사일 S-400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 한 예다. 당장 미 의회에선 “우리의 기술을 러시아로 넘기는 꼴”이라며 F-35 ‘라이트닝2’ 스텔스 전투기의 터키 수출 계획을 중단토록 했다.

● ‘21세기 술탄’의 자승자박 하나

미국이 일부 품목에 대해 특혜 관세를 없애자 터키 경제의 취약점이 더욱 두르러지면서 리라화 가치가 폭락하는 등 타격을 받았다. 에르도안의 독단이 위기를 자초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에로도안 대통령은 집권 이후 터키를 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를 호령했던 ‘제 2의 오스만제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보여 왔다. 건설경기 부양과 인위적인 저금리 등 개발독재 정책을 폈다. 부작용으로 지난해 물가가 10.9%나 올랐지만 금리를 낮춰 가계의 빚 부담을 줄여야 재집권에 유리했기 때문에 저금리를 고집했다.

에르도안이 내부 경제 불만을 삭이려고 반미 감정을 활용한다는 분석도 있다. 싱크탱크 미국진보센터(CAP)는 7월 펴낸 보고서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반미 발언을 포함한 호전적인 민족주의를 통해 권력의 전통성을 확보하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번 리라화 가치 폭락에서 보듯 문제 해결은 커녕 나라를 거덜낼 수도 있다는 우려가 없지 않다. 터키 카디르 하스대의 아흐메트 카심 한 교수는 NYT에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미국이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미국에 맞서고 있으나 자칫하면 파국을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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