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언의 마음의 지도]한 남자의 고백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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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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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나는 187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던 빈 근교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많이 아팠습니다. 잘 걷지 못하는 병으로 늘 집 안에서 지냈습니다. 창밖으로 친구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정말 부러웠죠. 고집을 부려 밖에서 놀다 보니 신기하게도 병이 나았습니다. 너무 심하게 놀았나요? 추운 날씨에 폐렴에 걸려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습니다.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빈 의과대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에 안과 의사, 일반 의사를 거쳐 정신과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정신분석학 이야기를 듣고 프로이트 박사 모임에 들어갔습니다. 계속 있었다면 후계자가 되었을까요? 박사와 나는 성격부터 너무 달랐습니다. 그의 이론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다가 쫓겨날 지경에 이르자 추종자 11명과 같이 떠나 내 학파를 세웠습니다. 박사의 압박에서 벗어난 자유를 기념해 ‘자유정신분석연구학회’라고 했다가 정신분석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박사가 반대해서 ‘개인심리학’으로 바꿨습니다. 번역이 잘못되었지만 일단 넘어갑시다.

내 평생의 힘은 열등감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병약했던 나와 달리 내 형은 튼튼하고 힘이 세고 커서는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내게 돈도 꽤 많이 보태주었습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 박사도 한때는 내가 닮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을 아시나요? 그들 모두 이름이 ‘지크문트’입니다. 열등감은 내가 내세운 학술적 이론의 토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열등 콤플렉스’도 내가 만들어낸 용어이지요.

젊어서부터 나는 사회적 약자들의 건강과 복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개업했을 때도 환자들 대부분이 곡예단 단원들 같은 하층계급이었지요. 그런 면에서 주로 상류층 환자들을 상대한 프로이트 박사와는 생각이 많이 달랐습니다. 박사는 내가 사회주의에 관심이 있는 점도 매우 싫어했습니다. 나는 박사가 무의식을 기반으로 개인의 심층적 갈등에 관심을 기울인 것과는 달리 아이들의 교육이나 사회 전반의 평등 문제, 예를 들어 여성의 권리 증진과 같은 문제에 관심이 컸습니다. 그래서인지 결혼도 러시아 출신 유학생으로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아가씨와 했습니다.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는 않았습니다. 러시아에 가서 살았던 딸과 사위도 시베리아의 집단수용소에서 잃었습니다.

프로이트 박사처럼 모교인 빈 의과대 정신과 교수가 되기를 원했었지만 교수 전원의 반대로 탈락했습니다. 그들에게 나는 프로이트 학파의 일원이었고, 프로이트 학파 이탈자였습니다.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미국으로 떠났으나 그곳에서도 정신과보다는 교육학이나 사회사업학 분야에서 가르쳤습니다. 내가 주로 상대한 사람들은 일반인들이었습니다. 부르는 곳은 가리지 않고 어느 곳이나 달려가서 개인심리학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는 대중 강연을 아주 즐겼습니다. 프로이트 박사의 정신분석학은 이미 자리를 잡았고 같이 움직이는 후학들도 많이 있었지만 나는 형편이 달랐습니다. 도와줄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바빠지면서 건강이 점점 나빠졌지요. 결국 나는 1937년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이라는 작은 도시에 3주일 연속으로 강연과 세미나를 강행하는 여행을 갔다가 호텔 앞 길거리에서 심장 발작으로 쓰러져 세상과 작별했습니다. 내 나이 67세였습니다. 나보다 14년 위인 프로이트 박사가 내 죽음에 대해 냉소적인 언급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2년 뒤에 구강암이 너무 심하게 재발해서 안락사를 택했습니다. 그래도 나보다 16년을 더 살았습니다.

죽는 순간 내 일생의 삶이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죽어서도 내 삶을 둘러싼 불행의 그림자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화장 항아리는 거의 74년 만에 에든버러에서 발견되어 겨우 내 고향 빈으로 돌아가 묻혔습니다. 돌이켜 보면 내 삶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서도, 프로이트 박사와 보낸 시절도, 그와 1911년에 헤어져서 보낸 세월도, 결혼 생활도 모두 힘들었습니다. 행복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불행한 시절이 많았고 너무 피곤했습니다. 나는 결국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경쟁심과 공명심에 싸여 투쟁하다 생을 마감했을까요?

내 삶 전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수용소에서 죽은 딸은 가슴에 묻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잘 자라주었고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정신분석학 정도의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으나 개인심리학 역시 심리학의 주요 분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후학들의 노력으로 학회와 학술지도 생겼습니다. 최근 ‘아들러 심리학’을 소개하는 책들이 일본과 한국에서 널리 읽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룬 것들이 세상을 떠나고 오래 뒤에나마 빛을 보게 돼 영광입니다.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면 나는 결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존재가 아닙니다.

내가 한 주장들은 프로이트 박사의 이론들과 아주 다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한때 그의 동료였지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무의식보다는 의식을, 개인보다는 사회를, 남성과 여성의 우열보다는 동등함을, 교육의 중요성을, 가정과 사회가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나를 비판하는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무의식을 다루지 않고는 의식이 달라질 수 없다. 개인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니 일단 개인의 정신건강이 출발점이 돼야 한다. 여성에 대한 정신분석학 이론의 오류는 이미 수정된 바 있다. 교육만으로 정신분석의 장점을 대체할 수는 없다. 가정과 사회가 모두 아름다운 세상은 이상과 목표가 될 수는 있지만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 그러니 개인이 지닌 갈등을 해소시키는 것만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심지어 이런 말을 덧붙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들러 박사, 결국 당신의 삶의 행적을 분석해 보면 당신의 무의식이 당신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을 부정하기 어렵지 않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크문트 형과 지크문트 박사에게 느꼈던 열등감에 대해서는 대답이 좀 궁하네요. 안녕히 계십시오. 나만을 생각하지 않고 남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면서 열등감으로부터 우월감으로 승화되는 삶을 사시길 기원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아들러 심리학#아들러의 열등감#개인심리학#개인의 정신건강#열등 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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