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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 거부한 그날, 한국인 사장의 발길질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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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 거부한 그날, 한국인 사장의 발길질이 시작됐다

조은아 기자 , 위은지 기자 입력 2018-02-27 03:00수정 2018-02-2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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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여성들 ‘외칠 수 없는 미투’]<上> ‘추방 공포’ 파고든 성폭력의 덫
《2년 전 한국에 온 30대 태국 여성 티앤(가명) 씨는 지난해 경기 화성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주방보조로 일하는 동안 끊임없이 구타에 시달렸다. 50대 한국인 남성 사장은 사소한 트집을 잡아 얼굴에 피멍이 들 때까지 티앤 씨를 마구 때렸다. 쓰러진 그의 등을 발로 짓밟는 일도 잦았다.

폭행은 티앤 씨가 사장의 잠자리 요구를 거절한 뒤부터 시작됐다.

사장은 걸핏하면 그를 때리면서도 가끔 농담을 섞어 잠자리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맞을 때마다 티앤 씨는 태국에 두고 온 아들을 떠올렸다.》

티앤 씨는 “솔직히 너무 화가 나고 ‘이러면서까지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에 슬펐다. 경찰에 신고하고 싶었지만 돈을 버는 일이 너무 급했다. 체류 허가 기간도 지나 추방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한국의 이주여성들은 일터 곳곳에서 성폭력에 시달리지만 언어와 문화 장벽 탓에 피해를 제대로 호소하지 못하는 약자 중의 약자다. 한국 여성들에 비해 법의 보호가 느슨하다 보니 고용주가 ‘갑질’을 일삼기 쉬운 권력구조가 만들어진다.

○ 폭행당하다 사망에 이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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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화성시의 한 태국 사원에서 만난 30대 태국 여성 쏨 씨와 쁠라(각각 가명) 씨는 기자에게 주변 이주여성들의 억울한 피해 사례를 쏟아냈다. 이들에 따르면 한국 남성들은 주로 체류기간을 넘겨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된 여성들에게 접근한 뒤 안정적인 직장과 생활환경을 미끼로 잠자리를 요구했다. 이 지역 공장의 한 한국인 사장은 늦은 밤 태국인 여성에게 ‘스마트폰을 사줄 테니 나오라’라며 여성의 숙소 앞까지 찾아와 스토킹을 하기도 했다. 여성의 컨테이너 숙소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성폭행을 시도한 남성도 있었다.

한국인 직장 상사에게 폭행을 당하다 살해된 여성도 있다. 12년 전 18세의 나이로 가난한 가족 생계를 돕기 위해 한국에 온 태국 여성 추티마 씨(사망 당시 29세)는 관광비자로 입국해 일하다 미등록(불법 체류자) 신분이 된 여성이었다. 경기 안성의 한 자동차 부품제조업체에서 10년간 일해오던 지난해 11월 어느 날, 그는 기숙사에서 쉬고 있다 한국인 직장 동료 김모 씨(50)의 전화를 받았다. “불법 체류자 단속반이 떴다. 내가 피신시켜 주겠다”는 통화였다. 추방되면 당장 모국에 있는 열세 살 딸과 가족 생계가 막막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김 씨를 따라나섰다가 경북 영양군의 한 야산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김 씨가 거짓말로 추티마 씨를 유인해 살해한 것이다. 김 씨는 추티마 씨를 감금하고 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추티마 씨의 유족 측은 김 씨가 성폭행을 시도하다가 추티마 씨를 살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기 화성이주노동자쉼터의 한상훈 활동가는 “브로커들은 생활용품 등을 사주며 호의를 베푸는 척하다가 나중에 이를 빚이라고 주장하며 성매매로 빚을 갚으라고 강요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 바닥없이 무너지는 인권

국가인권위원회와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이 2016년 여성 이주노동자 38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희롱·성폭행 피해를 당한 여성 이주노동자들 중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아 대응한 경우는 6.7%, 노동부에 신고한 사례는 2.2%에 불과했다. 모름·무응답이 거의 절반(48.9%)에 달했고, 말로 항의(24.4%)하거나 그냥 참는(15.6%) 경우가 많았다.

제대로 저항하거나 대항할 수 없는 이주여성의 현실은 기본적 인권의 파괴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충남의 한 깻잎 농장에서 일하는 20대 캄보디아 여성 짠나(가명) 씨는 다른 농장에서 일하는 남편과 열심히 맞벌이를 하고 있다. 짠나 씨는 최근 임신했다. 그런데 이를 안 농장주는 “낙태를 해야 (고용허가제에 따른) 근로계약 연장을 해주겠다. 당장 병원에 가라”고 했다. 짠나 씨는 “그럴 수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지만 9월에 아이를 무사히 낳을 수 있을지 불안하기만 하다. 이주노동자 지원단체 ‘지구인의 정류장’ 김이찬 대표는 “실제 농장주 압박에 못 이겨 낙태를 한 여성도 있는데, 여성이 낙태 후 회복이 안 돼 힘들어하자 농장주는 되레 ‘불법 낙태를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협박까지 하면서 일을 더 시키기도 했다”고 말했다.

○ 법적 보호, 이주 여성에겐 무용지물

남녀고용평등법은 외국인도 한국인과 다름없이 차별받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불법 체류자여도 차별로부터 보호받도록 돼 있다. 하지만 현실의 남녀고용평등법은 이주여성들에게 ‘죽은 법’이나 마찬가지다. 이주여성들은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연고도 없는 한국에서 억울함을 토로할 곳을 찾기 힘들다. 특히 고용허가제는 고용 연장 여부를 사업주가 결정토록 하고, 고용이 연장되지 않으면 불법 체류자가 된다. 여성이주 노동자들이 사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결국 이주여성들은 피해를 당해도 신고를 포기하고 억울함은 가슴에 묻는 경우가 많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성희롱 사건은 피해 사실이 신고되지 않으면 당국이 알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소라미 변호사는 “성폭력 피해를 본 이주여성들은 신고해봤자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니 신고를 하지 않는다. 고용센터들이 적극적으로 피해를 확인하고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화성=조은아 achim@donga.com / 위은지 기자
#미투#이주여성#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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